본문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절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와서 그들을 진정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고 간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사건은 결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에 의하여 의도된 연출이다. 그 증거는 성경의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예수님의 연출이라는 증거들
이 이야기는 오병이어 기적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여기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기적 후에 예수님 본인이 혼자서 뒷정리를 한다. 그리고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고 본인은 가지 않았다.(45절) 더 흥미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이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발견한 예수님이 바로 오지 않았다. 자그마치 약 6시간을 지켜보기만 한다.(48절) 왜 이러시는 것인가.
그 이유를 요한은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둔해졌기 때문이다.(막6:52)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마술사로서 단순히 나의 필요를 채우는 분으로 인식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오신 구주와 주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가지 상황을 준비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폭풍우를 만나게 하는 일이다. 그들로 하여금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그것은 앞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큰 기적이지만 무리를 위한 것이었지 제자들의 개인적인 기적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은 생명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내 생명의 구주로 인식을 못했다.
하지만 폭풍우는 달랐다.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 상황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제자들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이었기에,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요. 그 분의 작품이었다.
● 영적인 의미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나온 이 기적은 요한복음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그 중에 아주 독특한 차이는 마태와 마가는 둘 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신 후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음을 얘기한다. 둘 다 배에 오르신 후에 ‘건너가’라는 말을 썼다.(마14:34,막6:53)
반면에 요한은 의도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음을 알려 준다. 그것은 예수님을 배에 ‘영접’하자마자 그 배가 즉시,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21절) 여기서 영접(헬.람바노)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 11번 등장을 한다. 모두 다 예외 없이 예수님에게 사용했고, 그를 믿는 믿음과 연관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할 때에 ‘영접’이 같은 단어이다. 요한은 배에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한 단어를 썼다. 그것은 ‘곧’이라는 단어다. 배에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그 즉시(immediately) 바로 목적하던 곳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강조했기에 예수님이 능력자로만 인식될 수 있다. 이를 우려한 요한은 복음의 핵심을 이번에 끼워 넣은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즉시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물’은 심판을 의미한다. 지금 제자들이 풍랑이 이는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놓였다는 것은 우리 인생들이 종국에 맞이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와 그를 영접하는 자들이 심판에 이르지 않고(물에 빠지지 않고) 그들을 목적지까지 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로 요한이 앞서 5장에서 말한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말씀을 현장감 있게 이들에게 경험케 하신 것이다.(요5:24) 아무리 말로 해도 안 되니까, 도무지 이해를 못하니까 이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한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이 이들에게 바다 위로 걸어와 ‘내니 두려워말라’라고 한 말 중에 ‘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하나님의 이름이다.(출3:14)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풍랑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는 곧 너희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들을 바다로 몰아넣어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경험케 하게 만든 의도된 사건이다. 이를 통하여 제자들은 결국에 예수님에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마14:33)
● 역경속의 믿음
이 사건에서 우리를 당혹케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순종을 했는데 풍랑을 만났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풍랑과 역경은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에 만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 결과로 풍랑을 만났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사실 풍랑은 믿음이 있으나 없으나 모두가 다 만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믿음을 가질 필요가 무엇인가. 여기서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갖는 믿음에 대한 오해이다. 그것은 내 인생 속에 고난을 만나면, 믿음이 있는 자는 그 고난을 깨부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렇지 않고, 아무리 강한 믿음을 가진 자도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없어지지 않는 고난을 만나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은 풍랑을 가라앉히는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소유한 믿음은 그 풍랑 속에서도 마치 풍랑이 없는 듯이 그 풍랑을 이기는 믿음이다. 폭풍 속에서, 천하를 삼킬 것 같은 그 폭풍 속에서도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잃지 않는 자가 신자이다. 그것이 내게 임한 하늘의 천국을 이곳에서 사는 자이다.
그 평화는 내 힘으로 얻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 믿음만으로 가능하다. 그게 이 땅을 사는 신자에게 요구되는 믿음이다. 믿음은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이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 분이 내게 한 일을 기억하여 내가 경험한 그 하나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하는 것을 깨달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유한 믿음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경험한 후에 비로소 내 것이 된 것이 있었는가. 경험 전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3. 성경은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내가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4. 말씀에 순종했는데 풍랑을 만날 일이 있는가. 그 풍랑을 통하여 무엇을 배웠는가.
5. 내가 주로 사용하는 믿음은 어느 경우였는가. 그 믿음으로 얻게 된 결과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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