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호세아의 9번의 설교 중에 세 번째 설교이다. 설교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타락과 불의의 원인이 인애가 없음으로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본문의 가장 중요한 요절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절)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것을 원한다는 뜻이다. 그럼, 마음과 정성을 담는 예배는 무엇인가.
● 마음과 정성을 담은 예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인애’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인애(헤세드)는 ‘은혜, 긍휼, 자비’들으로 번역된 어진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히브리 개념의 인애(헤세드)가 성립이 되려면 반드시 ‘실천을 동반한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 이를 통하여 자기의 사랑이 참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니까 사랑은 감정적인 것으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대상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행하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애이다.
이것에 대한 현실적인 사례가 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발끈했다. 죄인들과 사회적 교제를 하는 것을 율법이 금했기 때문이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마9:13)고 하셨다. 여기에서 긍휼이 인애와 같은 단어다. 그 말씀을 하신 후에 ‘의사는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다’(마9:12)고 하셨다. 이게 인애이다.
단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인애가 아니다.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인애이다. 의사가 되어서 병자를 고치는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인애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한다’고 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히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만 그치는 것이 인애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내 삶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내가 실천으로 증명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 하나님 사랑: 실제적인 부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으로 교회에서의 봉사, 사역, 물질 등으로 교회를 섬길 수도 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 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복음서에 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 앞에 한 서기관이 와서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 계명이라 말씀하셨다.(막12:33) 이 말을 들은 서기관은 이 말을 제사 즉 예배와 연관을 짓는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번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 즉,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웃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이를 ‘지혜롭다’고 칭찬하셨다.
예수님은 이를 확인하듯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이라는 말로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임을 확증하셨다. 그럼, 어떤 것이 이웃 사랑인가. 어떤 방법으로 이웃을 섬겨야 하는가.
성경은 ‘사랑은 상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고전10:23) 우리는 율법에 매이지 않는 자유함이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정성과 마음과 뜻을 다 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상대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많은 행동들이 누군가에게 불편이 되고, 유익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기억하고 행할 때에 비로소 성경이 요구하는 이웃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 딱 이와 같다. 그들은 하나님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뭘 자꾸 행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한다. 그 인애는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참된 예배의 회복을 이루는 근본이 될 것이다. 그럼,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
● 예배의 중심: 예수
온전한 예배를 위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은 이런 선행으로 구원을 얻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주님임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 우리의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 인식이 없이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호세아 시대의 제자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도피성인 길르앗에서 악행을 행하고, 세겜으로 가는 자들에게 살인을 한다. 이 도피성은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살해했을 경우 피할 수 있는 처소이다. 여기에 들어가면, 아무리 살인을 저질렀을 지라도 그 사람을 보호하여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이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마땅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이 안에 피함으로 대제사장의 보호 아래 이 안에 산다. 그렇게 살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석방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진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길르앗과 세겜에 도망쳐 온 사람들을 제사장들이 돈을 받고 넘기거나 그냥 죽여 버렸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삶 속에 거룩한 예식과 율법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예수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도피성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도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됨을 말한다. 그 결국은 멸망이다.
이 호세아의 경고가 오늘 다시 우리 앞에 있다. 그 비참한 자리로 가지 않도록 번제가 아닌 인애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예배하라. 그 모든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며 그와 연합할 때에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복된 예배의 회복을 이루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예배는 언제인가. 왜 기억에 남는가.
3. 현재의 내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하는가. 예 혹은 아니오의 이유는 무엇인가
4. 상대의 호의 혹은 사랑이 부담스러웠던 경험이 있는가. 왜 그러했는가.
5. 예배 때에 내가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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