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바알신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고 이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줄 것을 약속하신다. 어떤 방법으로 하시는가. 그것은 거친들, 즉 광야로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의지할 것 아무 것도 없는 척박한 곳이며,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들을 먹이고 살리신 은혜의 땅이다. 왜 그곳으로 데리고 가시는가.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관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신 둘 다 섬기는 혼합종교를 갖고 있었다. 광야의 신인 하나님과 농경의 신인 바알도 섬겨서 양쪽 다 믿으면 복도 두 배로 받는 것으로 여겼다.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영적인 간음, 음행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애인도 사랑하는 것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방신을 둘 다 섬기는 자는 참 신앙인이 아니다.
그런데 두 마음을 품었으면서 본인이 한 마음인줄 착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데 말씀대로 믿지 않는 경우이다. 신앙 생활이 말씀을 기준하지 않고 경험, 다른 사람, 간증을 기반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신자가 아닐 수 있다.
말씀을 통하여 확인해 본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산에 올라 40일을 내려오지 않았다. 이에 불안한 모세의 형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 송아지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너희의 신’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송아지 앞에 제사를 드리고 온 백성이 즐거워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예배를 받으셨다고 생각했다.(출32장)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시며 이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이 땅에 그 어떤 형상도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십계명에 못 박아 둘 정도로 싫어하신다. 하지만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서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면 하나님이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만든 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영락없는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들에게 당신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분임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양쪽 신을 섬겨도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온 모든 물질의 복 역시 하나님이 베푸신 것임을 말씀하시며(8절) 그것을 인지하도록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럼, 광야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인가.
1. 소망의 복
하나님은 소망의 축복을 주시는데 그 복의 근거가 ‘아골 골짜기’라고 얘기하신다.(15절) 아골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사연이 있는 곳이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 시절에 아간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 했었다. 그 이유를 파헤치니 아간이 하나님이 금지한 전리품들을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로 인해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의 자녀들과 그가 소유한 모든 것들을 아골 골짜기에 던져두고 불사른 일이 있었다.
아골 골짜기는 ‘고통의 골짜기’란 뜻이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고통을 받은 곳이다. 그런데 이 고통의 장소가 소망의 문이 된다고 한다. 어떻게 소망의 문으로 변화되는가.
우리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고통의 대표적인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 있다.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골고다 언덕(해골의 언덕)이다. 예수님은 이 해골의 언덕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 고통과 절망의 상징인 이곳에서 소망의 문이 열렸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다.
이 죽음의 골짜기는 우리 모두에게 경제, 가정, 실패한 과거 등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고통의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죽음이 골짜기가 우리에게 소망의 문이 되어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가진 신비한 능력이다.
2.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복
기독교의 힘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명확히 알수록 우리의 신앙은 견고해 지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바른 믿음을 소유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광야의 축복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복’이라고 하신다.(20절)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가. 그것은 남편이 되어서 알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16절) 연애와 결혼의 차이가 있다. 연애는 아무리 오래해도 상대를 깊이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삶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다르다. 내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항상 모든 것을 같이 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 연애 때 결코 알 수 없었던 상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편이 되어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삶을 공유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평소에 아무리 하나님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할지라도 개인적인 삶을 공유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았다면 그것은 연애 수준이다. 결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만일 그분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삶과 동일하게 이어진다면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인지 알 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은 사람 손에 죽어가면서 ‘내가 하나님이이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노라’라고 얘기한다. 말이 안 된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신이면 최상의 권력을 갖고 모든 것을 다스려야 옳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 너무 말이 안 된다. 왜 이렇게 말이 안 되는가.
그것은 진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내가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설명이 없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다. 그렇게 밖에라도 끌고 올 수 밖에 없으니 강제성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 강제성이 곧 사랑의 표현이요. 행동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이끄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랑하면 절대로 이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 길이 우리에게 최선과 최상의 길이라 하시며 묵묵히 인도하신다. 그렇기에 내 인생에 광야를 만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반드시 하나님은 세월이 지난 후에 그 광야가 우리에게 축복이었음을 알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는 참으로 내 안에 우상이 없이 하나님만을 믿는 신자인가. 예 혹은 노라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3.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앙생활의 내용이 알고 보니까 성경적이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는가. 나누어 보라
4. 내가 겪은 경험 중에 가장 아팠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5. 성경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고 믿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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