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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2020. 사도행전 강해(23) 주께로 돌아오니라. 행9:32~43절

예수를 막 믿게 된 사울은 유대인의 박해로 인해 고향인 다소로 내려가 약 10여년의 세월을 무명의 사람으로 지내게 된다. 그 때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순회 사역을 하고 있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성도를 살피고 말씀을 전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여기서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세 가지로 살펴본다.

1. 조화의 하나님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 있는 성도들에게 심방을 갔다. 이 도시들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아마도 빌립일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아소도에서 가이사랴로 가는 길에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했다.(8:40) 그런데 아소도에서 가이사랴로 가는 길에 룻다와 욥바가 있다. 이것을 근거로 빌립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에서는 죽은 여제자 다비다를 살려냈다. 사실 이런 능력은 베드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집사였던 빌립도 동일하게 이러한 기적을 행하였었다. 그런데 왜 베드로의 사역은 자세히 써 놓은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가진 대표성 때문에 그렇다. 그는 명실 공히 예수님의 수석 제자로써 교회 공동체를 대표한다.

빌립이 복음을 전했을 당시에도 이런 동일한 일이 일어났었지만, 굳이 베드로의 사역을 강조한 것은 신자 개인과 교회의 조화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사마리아에서도 빌립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은 잠시 방문한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서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로써 더 큰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개인의 연합적 사역의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즘은 시대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온라인으로 예배한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각자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처이고, 성도 개인이 제사장의 신분으로 충분히 예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이것을 우리는 왕왕 ‘각개전투’로 비유한다. 각개전투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생존’과 ‘목표 점령’이다. 이것은 영적 전쟁에도 동일하다. 현재의 상황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공동체 가족들과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야(생존) 한다.

그러나 각개전투의 목적은 ‘생존’만이 아니다. ‘목표 점령’을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가진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무너지면 처음에는 자유로운 것 같으나 언제고 내 신앙 전체가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신앙의 깊이를 이루되, 교회와 함께할 때에 우리의 신앙이 굳건히 설 수 있다. 초대 교회가 불같이 성장하는 가운데 단단한 교회의 모습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스스로가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조화 가운데 잘 서 있었기 때문이다.

2. 베드로의 사역 방식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베드로의 사역 모습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애니아라는 중풍병자를 고치며 베드로가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34절)라고 한 말은 예수님이 중풍병자(마2:11)와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를 고칠 때 했던 말(요5:8)과 거의 같다.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 낼 때에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한다.(40절) 이 말 역시 예수님이 회당장의 아이가 죽었을 때에 그 아이에게 한 말과 동일할 뿐 만 아니라,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나가라’고 한 것도 예수님과 같다.(막5:37~41)

이 말의 의미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며, 그 사역의 모습은 예수님이 했던 것을 그대로 모방(imitate)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에 대한 아주 중요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이루는 것은 혼자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통하여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옆에 있어야 한다. 멘토가 필요하고, 나를 끌어주고, 지켜주고, 본 받아야 할 사람을 통해서 내 신앙이 성장한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을 본받으라’(고전11:1)는 말을 함으로 신앙의 성숙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과 함께해야 함을 말한다. 기독교는 혼자 도 닦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3. 베드로의 세계관의 변화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 무두장이는 ‘가죽 제조 기술자’이다. 당시 유대 문화는 무두장이를 최하층 천민으로 여겨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 시체를 만지는 부정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통 유대인인 베드로가 무두장이의 집에서 유숙한다. 무슨 말인가. 베드로가 지금 자기가 갖고 있는 신앙의 편견을 깨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이 만민에게 열려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베드로는 복음 안에서 그가 갖고 있는 프레임을 깨부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제일 먼저 부숴야 할 큰 프레임이 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개념이다. 믿음은 그렇게 쉽게 정의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제시된 믿음은 인간의 상식과 지식과 논리 속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은 아마도 ‘문화’에 녹아든 개념일 확률이 아주 높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말 속에는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믿음을 설명할 때에 꼭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한다.(엡2:8) ‘내가 믿었다’는 말은 분명 나의 의지와 결단이 포함된 것인데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왜 이리 복잡한가. 이것은 성경의 믿음이 우리 인간들의 언어 속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찬가지로 본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 등장한다. 그것은 지금 방금 믿은 그들을 향해서 ‘그들이 주께로 돌아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35절) 그 말은 곧, 지금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예수를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본래 내 자녀인 그들을 다시 내게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내 이성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당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성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내 노력과 내 수고가 아닌 내가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인생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비밀을 이해할 때에 내 안에 자유가 시작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교회가 내 신앙의 성숙과 성장에 도움을 주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 구체적 사례를 말해보라

2. 나는 신앙의 어려움을 만나면 누구를 모델로 삼고 이겨내는가. 실제의 인물 가운데 말해보라

3. 현재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신앙의 동료들은 누구인가. 언제 도움을 받고 있는가

4. 나는 성경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 혹은 본문이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5. 내가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정의를 내 말로 표현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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