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의 비유는 아주 유명한 비유이다. 그래서 모두들 이 비유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듯이 보인다. 어떤 부분이 그러한가. 먼저 당시의 목축문화를 살펴본다.
● 당시의 목축문화
당시에는 대부분의 가정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공동 우리’를 만들어 ‘문지기’를 고용했다. 문지기는 밤에 양을 훔쳐 가려는 도둑과 강도를 지키고, 사나운 짐승 떼(이리)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밤새 지킨 후에 아침이 되면 주인(목자)에게 그들의 양을 인계해 주었다.
이 배경을 두고 예수님은 예화를 하나 하셨다.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공동 우리에 목자가 찾아오면 목자가 자신의 양 떼를 불러 모아 데리고 나간다는 예화이다. 많은 경우에 여기서 ‘우리 안’을 천국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9절)라는 말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하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찾아와서 무리에서 자신의 양들을 빼갔기 때문이다.(3절) 그럼, 예수님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남은 자들이 천국에 있는 셈이 된다. 또한 예수님은 스스로 ‘양의 문’(7절)이라고 하셨다. 그럼, 예수님이 목자와 문. 이렇게 둘이 된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예화이다.
왜 이런 혼동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이 하나의 예화 안에 두 개의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첫 이야기를 했는데 유대인들이 못 알아들었다.(6절) 그래서 같은 배경에 다른 이야기를 또 하나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화가 논리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그럼,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 첫 번째 이야기
이 이야기는 앞의 9장의 맹인의 이야기와 이어진다. 앞서 예수님은 맹인을 찾아와서 눈을 뜨게 해 주고, 이 일로 말미암아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난 그를 다시 찾아가서 품에 안으셨다. 즉, 유대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서 그 맹인을 불러서 빼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화는 이런 상징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목자, 불림 받은 양은 신자, 양의 우리는 유대주의(유대교) 우리 안은 유대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통하여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자를 유대주의에서 빼내듯이, 자신의 양들을 빼 내어 구원 받게 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과 문지는 율법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이루신 분이시기에 당당히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 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들이기에 담 넘어 들어온 강도이다. 문이 아닌 곳으로 들어와서 그곳에 있는 양들을 모두 상하게 하고 혼동시키고 망하게 함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이야기를 통하여 전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그것은 ‘내 백성은 내가 챙긴다. 그들을 위험한 곳에 결코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이다. 오셔서 자기 백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데려 가시는 것이 구원이다. 내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 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천국이다. 그러나 예수 믿은 지 수 십년이 되었는데 그것으로만 족한 인생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기독교의 구원과 내용에 대하여 가난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갖는 구원 그 이후의 축복은 이 땅에서의 삶에 더 이상 좌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추적하셔서 책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감격이다.
● 두 번째 이야기
유대인들은 첫 번째 이야기를 못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면 모두가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리 중 누군가만 구원 얻는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같은 이야기에 상징을 바꿨다. 이번에는 우리 안을 천국, 문을 예수님 자신으로 비유했다. 그래서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문 밖에 없는데 그 문이 자기 자신이라 소개했다.(7절)
이 이야기를 통하여 구원은 민족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유대인, 이방인 상관없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9절) 첫 번째 이야기의 핵심은 구원은 내 의지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심을 말하고, 두 번째 이야기는 구원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라는 문 밖에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에는 이 모든 두 예화는 한 가지의 상징성을 가진 한 단어로 모아진다. 그것은 예수님이 ‘선한 목자’라는 것이다.
● 선한 목자의 의미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어떤 목자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삯꾼 목자와 비교한다. 삯꾼 목자는 맹수가 오면 달아나는 목자이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고 얘기한다.(11절) 그래서 우리는 흔히 삯꾼 목자가 나쁜 목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가 정상이다. 실제로 남의 집 가축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도망가는 것이 정상이다.
이 비교는 선한 목자의 의미가 우리의 상식과 수준을 뛰어넘는 신실한 자임을 말하기 위함으로 대입된 사례이다. 그렇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신자의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지켜낼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일지라도 행하시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 십자가이다.
이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눅15장)이다. 철없이 하나님의 품이 싫다고 떠나도, 결국에는 끝까지 우리를 찾아서 끝까지 끌어오시는 분.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찾은 자도 목자요. 데리고 오는 자도 목자이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 자가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오늘 누릴 수 있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는 평소에 이 예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나누어 보라
3. 내 신앙이 율법에 매여있거나, 무언가를 해서 복을 받으려하는 경향이 있는가. 어떤 부분인가.
4.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강권적으로 끌고 있다고 느낀적이 있었는가.
5. ‘선한 목자’에 대한 느낌을 하나님과 연결하여 내 나름대로 표현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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