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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Soo Yong Lee

1.30.2022. 아브라함의 이야기(11) 오직 주로 인하여. 창20:1~12절

Updated: Feb 3, 2022

아브라함은 그동안 꽤나 믿음의 성장을 보였다. 318명의 사병으로 4개국 연합국과 전쟁을 치러 승리도 하고, 특별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두고는 하나님 앞에서 타인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20장에 와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파는 일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의 처음 만났을 때 행했던 12장에서와 같은 행위이다. 전혀 신앙인 답지 않은 아브라함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12장과 20장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본다.

● 12장 vs.20장: 유사점

창세기 저자는 일부로 12장에서 썼던 단어와 문장을 그대로 20장에 옮겨왔다. 예를 들면, 그가 남방(네게브)로 간 것, 가데스와 술 사이에 거한 것(히.구르), 네게브 땅으로 옮겨 간 것(히.나싸), 애굽과 그랄을 떠나며 그 나라의 왕들로부터 재물을 챙긴 것 등이 같은 단어 혹은 같은 문장이다.

저자는 왜 같은 단어를 써 가며 12장과 20장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했는가. 그곳은 아브라함이 그동안 변해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12장으로부터 25년이 지났지만, 실제 그는 변하지 않았다.

● 12장 vs.20장: 차이점

12장에서는 애굽으로 갔지만, 20장의 그랄은 여전히 가나안 땅이다. 나이에 있어도 차이가 있다. 애굽으로 갔을 당시의 아브라함은 75세, 사라가 65세였다. 그런데 그랄에 갔을 때는 아브라함이 100세이고, 사라는 90세이다.

왜 90세된 여인을 그랄 왕이 아내로 맞이하려 했는가. 이번에는 사라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가나안 땅의 유명한 장수였던 아브라함의 가족과 정략결혼을 맺어서 당시 족장이었던 아브라함의 무리들과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불미한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장(12장, 20장)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12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막 믿기 시작한 시점이다. 아브라함은 12장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애굽의 바로가 무서워서 떠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반면에 20장에서의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대로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사건이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전적 부패의 본(example)을 잘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에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12:2,3) 그 약속의 실현이 오늘 본문이다. 후손이 없었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그의 아내와 여종의 태가 열렸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 한 점이 있다. 그것은 그가 기도해서 아비멜렉이 복을 받았던 때가, 아브라함이 신앙의 절정, 성숙함을 보여 줄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부끄럽고, 보잘 것 없고, 망신스러울 때였다. 언제인가. 그것은 그가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넘겨준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하나님은 하필 이 때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는 사역을 하게 하셨다.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신앙의 열심이나, 믿음의 수준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은혜와 사랑을 자신의 자녀에게 조건 없이 부어주신다는 것을 명확하기 위하여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불신자인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반면에 신자인 아브라함은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반면에 아브라함은 거짓과 위선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경은 지금 아브라함의 신앙의 수준을 아주 형편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 답은 21장에 있다. 21장에 가면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다. 만일 이삭이 태어나기 직전의 아브라함의 모습이 100점 만점의 신앙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오해한다. 어떻게 오해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수준이 만점을 맞는 수준이 되니까 드디어 하나님이 이삭을 허락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 이는 경건하게 믿고, 믿음대로 살고, 많은 사람에게 본이 되는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보상이다. 만일 이 일이 신앙의 상식이 되면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 무언가 큰 선물을 받으면 나의 노력과 공로로 인함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받던지, 누리던지 그것은 내가 받는 정당한 대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 자체를 근본부터 뽑아 버리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오랜 소원이었던 이삭을 주기 전에 아브라함의 본 모습, 인간의 근본의 모습이 어떠한 가를 폭로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토록 보잘 것 없고, 가능성도 없고,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자에게 찾아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내신다. 이것을 놓치는 것처럼 비참한 신앙인은 없다.

본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소개한 사실이다.(7절) 이것은 형편없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만들고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또한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복의 통로로 세상에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렇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삭 때문이다. 이삭이 없으면 아브라함도 없다. 마찬가지로 부족한 우리가 한량없는 주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이삭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근거하고 시작하고 가능하다. 나의 행함에서 주가 행하신 일로, 나로 인함이 아닌 오직 주로 인하여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고, 오직 기독교만이 가진 은혜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은 무엇인가.

3. 하나님께서 내 신앙의 수준과 상관없이 약속한 복을 주신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앙의 진보(혹은, 성숙)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때로는 내가 열심히 노력할 때에 하나님이 보상을 하실 때가 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5. 선지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내 삶 가운데에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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