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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2019.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라Ⅰ : 기도의 재건(1). 느1:1~11절

신자에게 있어서 ‘기도’ 만큼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도’ 만큼 우리를 낙담케 하는 것도 없다. 왜 이런 감정이 우리에게 찾아오는가? 그것은 기도를, 신자가 소유한 ‘마땅한 특권이요 기쁨’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소원하는 바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루어 내야 할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에게 내 필요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작은 기도에 응답하신다 것은 우리를 ‘피조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녀’로 여기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많은 신앙의 위인들의 기도가 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 많은 기도 중에 백미를 이루는, 기도의 모든 것을 갖춘 기도라 할 수 있다. 느헤미야의 기도가 모범이 되는 이유 두 가지를 살펴보자.

1. 그의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기도였다.

느헤미야는 본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란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다 불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와 울며 탄식하며 기도했다.

그 때 그가 어떤 형식의 기도를 드렸는가? ‘금식’으로 기도했다(4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인해 ‘금식의 기도가 효과가 있다’라고 생각하여 무슨 간절한 기도 제목이 생기면 금식으로 기도한다.

그러다 보니까 금식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하루 금식, 3일 금식, 1주일 금식, 21일 금식, 100일 오전 금식, 40일 금식’등으로 하나님 앞에 식사를 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경에서의 금식은 밥을 굶는다는 것에는 그닥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요구하는 금식은 기도의 모양과 형태에 있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금식의 의미는 “이 일의 해결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라는 고백에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 갈 때에 문제를 만날 때에는 그 해결 방안으로 사람을 만나고, 물질을 필요로 하고, 이리 저리 다녀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금식은 그 에너지원이 되는 양식을 끊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이 일의 해결이 내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있다는 고백이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금식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역대하 20장에 나오는 유다와 이방 연합국(모압, 암몬, 마온)과의 전쟁에서 잘 볼 수 있다. 여호사밧 왕은 이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한다. 이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전쟁은 에너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빵을 먹었다면, 전쟁 전날에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더 힘을 내서 전쟁을 치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오히려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군대 앞에 성가대를 세운다. 이것은 여호사밧 왕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계획을 주께 맡긴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그의 진심을 받으셨고, 여호사밧 왕에게 승리로 응답하셨다.

만일 금식을 밥을 굶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땡깡생때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가난한 신앙은 없다. 기도의 본질을 회복하라. 그럴 때에 더 많은 준비된 신앙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귀를 여는 자리이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여는 자리’가 아니라 ‘귀를 여는 자리’여야 한다는 것은 기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느헤미야는 기도할 때에 정확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삼아 기도했다(8,9절)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면 흩어진 백성들을 다 불러 돌아오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이전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 즉, 약속을 했으면 지켜달라는 요구이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 뜻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듣고, 내 삶을 나누는 것. 그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삶을 이끄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만일 내가 기도의 자리에서 귀를 막고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도 우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내 열심과 정성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와의 차이는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내 인생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 뜻, 내 의지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그분의 계획이 더욱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입을 열어 기도했다면, 이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여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금식’을 해 본 경험이 있는가? 무슨 일로 하게 되었으며 어떠한 응답을 받았는지 나누어 보라

3. 느헤미야처럼 다른 이가 겪는 아픔을 통감하며 안타깝게 기도해 본적이 있는가? 무슨 일이었는지 나누 어 보라.

4. 내가 주로하는 기도의 습관, 유형, 방법은 무엇인가? 왜 그러한 기도의 형식이 좋은가?

5. 기도 중에 들은(알게된, 깨달은)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 는가?

6. 내가 성경을 잘 읽지 않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열심히 읽는 이유는?

7. 내가 땡깡 수준으로 기도했던 경험이 있는가?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좋은 경험, 안 좋았던 경험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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