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이다. 교회 역사에 처음으로 열리게 된 이 공의회는 바로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공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지침을 가져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모임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서 은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다. 이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것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이 말은 곧, “예수만 믿는 믿음으로는 부족하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울이 수년 동안 가르친 것과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안디옥 교인들이 이 말에 흔들렸다. 왜냐하면 이들이 온 예루살렘 교회는 본교회이고, 안디옥 교회는 지교회이다. 그러니까 12 제자로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더 바른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것은 믿음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일이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적지 않은 다툼과 논쟁을 했다.(2절)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자 안디옥 교회에서는 교회의 증인 몇 사람과 함께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 처음으로 ‘공의회’가 예루살렘에서 열리게 된 배경이다.
이 공의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행하신 일을 보고했다. 반면에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해서 한참을 변론을 했다. 그 때 계속 이것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일어나서 결론을 내린다. 그의 결론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성령을 받고, 믿음으로 깨끗케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도 주 예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7~11절)
베드로가 이렇게 단언한 이유는 그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앞서 10장에서 백부장 고넬료의 사건을 통하여 그가 설교 할 때에 백부장 온 가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확인했었기 때문이다.
이 예루살렘 공의회 결론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이 회의에서 내린 결론이 기독교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말이 안 되는가.
● 율법으로 얻을 수 없는 구원
유대인의 믿음의 시조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믿음’ 때문이다.(창15:6)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다. 율법은 그 때를 기준으로 430년이 지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것은 율법을 지킨 행위가 아니다. 전적으로 믿음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그를 설득해서, 그를 믿게 만들고, 그 믿음을 근거삼아 이루어 내신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있기 전이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 이루어진 이 구원은 나중에 생긴 율법이 파할 수 없다. 그렇기에 구원은 율법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갈3:17)
사도 바울은 이 일을 로마서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그는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설명했다.(롬3:20~24)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만일 누군가 ‘믿음으로는 부족하기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복음에 반하는 얘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백지화 시키는 일이다.
왜 사람들이 ‘믿음으로만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 하나, ‘자기 의’ 때문이다. 내가 의로워져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함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제시하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여 구원을 결정한다는 것은 완전한 ‘휴머니즘’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보이지 않게 우리의 신앙의 세계에도 슬그머니 자리 잡고 있다. 이로 인하여, 성경을 묵상하고 적용하는 과정 속에도 성경이 제시하는 방향이 아닌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심이 되어 사고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그것은 ‘자족’에 관한 부분이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의 자족은 그가 비천, 풍부, 배부름, 배고픔, 궁핍을 겪음으로 알게 되었다.(빌4:11,12) 이 말씀을 많은 경우에 이렇게 묵상한다. 모든 문제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재정의 상황, 가족의 문제, 병고의 문제 등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여건을 찾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며 찬양하는 인생으로 살기로 다짐한다.
지금 위의 경우는 완벽한 신앙의 성찰이요, 신앙의 성숙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인본주의 차원의 자족이다.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의 자족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족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빌립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자족은 결코 이러한 자족이 아니다. 그럼 어떤 자족인가. 그의 답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의 자족이다.(13절) 그렇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 예수가 빠진 자족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다.
이 자족은, 부족한 가운데서 내가 가진 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도 없을 지라도 “나는 예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부족해도’가 아니라 ‘없어도 좋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영치품을 넣어 주러 온 교인들에게 ‘올 때 안 다쳐서 감사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고통에 함께 하니 감사하다’고 말한다.(14절)
이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깨달은 세상을 사는 ‘일체의 비결’이다. 그럼, 율법은 안 지켜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구원 얻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방향과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을 준수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손해가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말자. 이 때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격려인 “잘하였도다. 잘 버텼도다. 잘 견디었도다”라는 격려를 기억하자. 이 위로를 주께서 내게 주시는 것으로 여기어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자.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는 누구와 대립의 상황이 올 때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는가. 가장 현명한 방법은 어떤 것인가.
3. 바울은 안디옥 교인들로부터 지지 받지 못했다. 내가 가장 정성을 쏟은 사람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4. 나는 예수로 만족하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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