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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6.2022. 아브라함의 이야기(12) 은혜를 사려는 자. 창21:1~13절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오래된 약속이 성취되는 장면이다. 그것은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로부터 아들 이삭을 낳게 된 것이다. 실로 약속을 받은 지 25년 만이다. 성경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말한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2절)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이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1절에 아주 의미 있는 단어 하나를 심어 놓으셨다. 그것은 사라를 ‘돌보셨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파카드’라 하는 이 단어는 ‘방문하다(visit), 주관하다(in charge, manage)’라는 의미의 말로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을 주관(관리)할 때(창39:5)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신다고 말할 때 쓰였다.(창50:24)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보셨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보살피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직접 찾아오셔서(visit) 실제적으로 그녀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고(in charge) 경영(manage)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갑자기 눈에 뜨이는 일이 있다. 그것은 사라가 애굽과 그랄에서 두 번이나 팔려갔던 사건이다. 인생의 가장 최악의 순간에 그를 건져낸 것은 믿었던 남편이 아니었다. 하나님이셨다. 팔려간 사라를 직접 찾아오셔서 그를 지키고 건져내고 다시 그의 삶을 이끌어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셨다. 언제나 그 어려운 순간에는 하나님이 그녀의 곁에 계셨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 그것은 우리를 보살피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매 순간 마다 찾아오셔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여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오늘의 눌림에서 자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한 인생의 길이 때로는 불완전하고 온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직접 찾아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협력하여 가장 선한 것으로 내게 이루실 것이다.

● 하나님의 정한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정한 때(시기)에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정한 때’는 언제인가. 2절에 등장하는 ‘시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모에드’이다. 이 단어가 가진 뜻은 ‘이미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반복적으로 ‘언약의 후손’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다.(12:7,14:4,17:6,18:10) 그런데 이 ‘모에드’라는 말은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부터 이삭이 태어날 때가 정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 후손을 약속했을 때에 처음부터 25년 후라고 말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때’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가 갖고 있는 연대기적 시간(헬.크로노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환갑은 만60세 생일이다. 우리가 이 날에 이르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이나, 재능이나, 돈을 지불하는 것이 필요 없다. 그저 날짜가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는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날이 되니, 이삭을 주신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나이와 그다지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 정한 시기에 이삭을 주었다는 것은,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을 헬라어로 ‘카이로스’라 한다.

이것은 연대기적 날짜와 그다지 상관없다. 물론 연대기적 날짜를 필요로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카이로스는 성도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한 것이 그에게 완성되는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이다.

그럼,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이 태어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의 100세는 완전히 자기의 힘으로 후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때이다(히11:12) 그리고, 이스마엘이 독립해서 나갈 수 있는 성장의 시간이 찬 때이다. 후에 이삭의 후손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을 통해서 영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는 연대기적인 날짜를 기다리지 말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집중하고 그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 이삭과 이스마엘의 충돌의 의미

이삭(약 3세)이 젖을 뗄 때가 되었을 때 이스마엘(약 17세)이 이삭을 놀리고 희롱한다. 이로 인해 여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난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충돌은 영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해석을 했다. ‘육체를 따라난 자’(이스마엘)가 ‘성령을 따라난 자’(이삭)을 박해하는 것이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갈4:28,29)

‘육체를 따라난 자’의 상징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내 뜻, 내 의지, 내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를 의미한다. 그것이 이스마엘이다. 반면에 ‘성령으로 난 자’는 인간적인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오로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태어난 자를 말한다. 그것이 이삭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 행위로 대변되는 이스마엘과 하나님의 은혜로 대변되는 이삭은 여전히 우리 안에 갈등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본다. 우리는 은혜와 행위가 발란스를 이루는 신앙을 참 신앙의 기준 삼는다. 이 말은 상당히 타당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말 만큼 기독교를 모욕하는 말이 없다. 이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말이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내가 말씀으로 사는 신앙의 행위는 결코 발란스를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그 강력한 은혜에 비준할 수 있는 우리의 신앙의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은혜는 조건과 이유가 없다. 이것을 놓치니까 내 열정과 충성으로 내 신앙을 자꾸 대변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 노력으로, 그 열정의 행위로 은혜를 사려고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열정을 다해 충성했다. 그는 그것을 이유삼아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가 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은 그의 마지막을 잘 죽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준 삼는 것은 무엇인가.

3. 하나님이 내 소원 혹은 내 기도를 이루어주었다고 생각이 되면, 그 후의 나의 영적인 변화가 있었는가.

4. 내 노력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이 있는가. 어떤 것인가.

5. 내가 지금 마음에 가장 눌림이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왜 이러한 눌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6. 하나님이 지금 나를 데려 가신다면 내 인생에 대한 나의 스스로의 평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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