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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 마5:10~12절. 12.29.2019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핍박을 당하는 종교는 기독교이다.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현재는 무슬림과 힌두교인 등에게 박해를 당한다. 팔복 마지막 시간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이란 말씀으로 기독교 박해의 이유와 박해의 또 다른 의미를 살펴보자.

1. 왜 기독교를 박해하는가? : 1) 진리에 관한 싸움이기 때문에

왜 사람들은 유독 기독교를 박해하는가? 왜 특별히 기독교를 싫어할까... 물론,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도덕적 문제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미디어를 통해서 폭로되는 교회와 유명 목사들의 위선적인 모습 때문에 그런 것도 한 이유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는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문제이다. 비리나 위선은 타종교 안에서도 일어난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이런 문제가 있기에 이것을 기독교만의 문제라고 말하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다.

그럼, 왜 유독 기독교는 어느 곳이든 박해가 심한가?

그것은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서도 답을 줄 수 없는 유일한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악한 영들이 싫어한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뿌리 뽑아 없애려고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이 ‘진짜 진리가 맞구나’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반대되는 영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이다. 그런데 사탄 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사탄을 섬기는 종교이든지 간에 그들이 갖고 있는 심볼(symbol)에 꼭 등장하는 것이 있다. 십자가를 태우든지, 십자가를 거꾸로 뒤집든지, 십자가의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든지, 아무튼 늘 공격 대상은 단 하나, ‘십자가’이다.

사탄 음악을 하는 사람이 연주의 끝 마지막 퍼포먼스 시간에 목탁을 태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슬람 경전 꾸란을 찢는 예식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 단 한번도 그런 것을 본적이 없다. 그들은 늘 예외없이 십자가를 공격한다. 왜 그럴까? 다른 모든 종교는 다 한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공격대상은 늘 십자가이다. 다른 것은 가짜이지만, 예수님은 진짜 이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탄은 십자가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가 폭로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고난이 따라오게 된다(11절).

2) 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세상의 의는 크게 윤리/도덕적 의, 인본주의, 범신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모두가 다 인간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의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의는 이 의가 누구로부터 왔는가? 어떻게 이룰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선한 것을 조합하거나 어떤 요소들을 키워서 구원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그것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부터 주어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과 공로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된 것이며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 바꿔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0절의 ‘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바로 이어지는 11절의 ‘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자’와 병행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말하는 ‘의’임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확히 구분하고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의’라는 단어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도덕’과 ‘사회 정의’로 해석을 하게 되고, 스스로 내가 의로운 자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신자의 삶은 내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핵심 목표와 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고 얘기한다(눅6:26).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슈바이처, 테레사, 간디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다 그들의 삶을 칭찬한다.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것이 화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의 공로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당연히 저들은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우리에게 화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로 칭찬 받는 인생이 되면 안 된다. 우리는 부족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라는 것이 진리이고, 그 자세가 우리의 진심이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내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가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2. 박해의 또 다른 의미

10절의 ‘박해를 받은’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디오코’라는 말인데,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박해’라는 말 이외에 ‘몰아가다, 내몰다, 뒤 쫓아가다’라는 뜻이 있다. 이 단어는 목자가 양을 몰아갈 때 쓰는 단어이며 팔복에서는 수동태이다. 그러니까 목자가 목적을 두고 한 곳으로 몰아가는 모습이 ‘디오코’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의’이기 때문에 이런 번역이 충분히 가능하다.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는 너희여’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팔복을 듣고 있는 자들은 제자들이다. 지금 막 예수를 믿은 상태이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고난과 박해를 받기 전이다. 또한 이 ‘박해를 받은’이라는 말은 수동태이고 완료형이다.

그렇기에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이런 뜻이 된다.

“네들이 지금 현재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네들이 원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불러서 이곳에 왔고, 너희의 남은 삶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이끌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있는 말이 ‘박해를 받은 너희는 복이 있다’라는 뜻이다. 왜 그것이 복인가? 이제 신자의 남은 평생은 그리스도와 동행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들이 천국이 이를 때까지’ 그들의 삶이 이제는 보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후에 벌어지게 되는 축복이요. 은혜이다.

팔복의 내용을 보면 마치 우리는 손해 보고 약한 자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약한 자가 아니다. 아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이고,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이다. 생명은 반드시 사망을 이긴다. 우리 신자 된 우리의 본분과 존재 이유와 원리를 잘 이해하고 아는 자가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 찔렸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를 삶의 경험 혹은 이론을 가지고 말해 보라

3. 남들이 보기에 선한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누구였는가?

4. 하나님이 내 인생을 몰아가고 있다고 생각이 될 때는 언제였는가? 결론적으로 어떠했는가?

5. 나는 예수라는 진리가 내 안에 굳건히 박혀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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