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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o Yong Lee

사도행전 강해(16) 유대인의 허상. 행7:51~60절. 09.13.2020

기독교인들의 순교는 극단적 무슬림들이 행하는 ‘자살 테러’ 혹은 민족 열사들의 투쟁을 통한 죽음과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행한다. 무슬림들은 죽어서 천국과 보상을 받기 위해서이고, 민족 투사들은 현세의 자신 혹은 후대의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온전히 복음과 복음을 듣는 이들을 위함이다. 스데반 역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돌로 치는 이들을 축복하며 떠났다.(60절)

성경에는 어느 한 곳에서도 순교자를 크게 보상한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반대의 가르침이 있다. 천국은 어떤 노력과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단순한 ‘믿음’ 하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데반이 자신의 목숨과 바꾼 그들에게 전하고자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1. 할례의 허상

유대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로 인해 율법의 한 명령인 할례를 모두가 다 행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들에게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 전했다.(51절)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전하 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를 믿지 못하고 하갈에게서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을 낳았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요구했다.

할례는 남성의 성기 표피 끝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음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을 상징하는 것인 반면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시는 다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며, 은혜로 너를 빚어 가겠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결국에는 그 약속된 자녀 이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러니까 할례는 ‘나를 죽이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시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이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들은 물리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으로 받지 못하고(마음의 할례), 말씀을 듣지도 않는(귀의 할례) 지경에 이르렀다고 그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갖는 많은 실수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어떤 종교의식을 행하면 스스로 신자의 도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를 많이 듣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신앙을 대신한다. 물론,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앙의 행위 뒤에 내가 숨는 것이다. 내가 순교까지는 못하더라도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자아에 대한 싸움이 없다.

하루 종일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신자의 증거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내가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가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 없이 행하는 모든 신앙생활은 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이며 이를 계속하다 보면 ‘목이 곧은 자’가 된다.(51절)

이것이 스데반의 설교에 나타난 지적이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통해서 그들의 교만과 허세와 끝도 없는 자랑과 우월감에 붙들려 있는 유대 민족을 향하여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

2. 율법의 허상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도구이다.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고, 그것을 지켜낼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어 비로소 그리스도가 내게 필요함을 알게 된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율법을 받을 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것, 그 하나로 만족했다. 율법을 그들에게 허락한 이유와 목적에 대한 본질을 놓치고, 민족의 자긍심이라는 허상만 존재했다.

이 스데반의 설교를 풀어 놓은 예가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온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받으러 간 후에 얼굴 뒤에 후광이 생겼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께 집중을 못했다. 그래서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니 이번에는 수건을 집중한다. 이를 개탄한 사도 바울이 이제는 그런 허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가라고 얘기한다.(고후3:16)


그렇다. 허상을 버려야 자유함이 있다. 모든 허상을 버리고 주님께 집중할 때에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깊은 억눌림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입게 될 것이다.(고후3:17)

스데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신자의 삶과 존재 원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를 치장하기 위하여 기독교적인 모든 사건과 내용을 동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가 드러나는 삶. 그것이 우리 신자의 마땅한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늘로부터 엄청난 권세와 능력을 받은 자이다. 그 권세는 더러운 귀신을 쫓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이다.(마10:1) 그런데 스데반은 그 놀라운 권세와 권능을 안고 죽는다.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받은 권세와 능력은 나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쓰이는 권세와 능력이다.

스데반은 죽을 때에 하늘의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죽는다. 그는 설교와 삶 모든 것이 하늘의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께로 집중하게 만들고 죽는다.

왜? 그가 죽어야 사람들이 시선이 그리스도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쏟아지는 돌을 맞고 여전히 살아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은 그가 가진 신비로운 능력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권세와 능력을 “아버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그들을 끌어안고 죽는다.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했는가 하며 그들의 시선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스데반의 죽음이고,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신자의 길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을 때에 내가 갖게 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

3.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의 허상은 무엇인가.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누어 보라

4. 내가 생각하는 삶 속에 나타나는 신자의 증거는 무엇인가

5. 율법은 나를 자유하게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나를 짓누르는가. 왜 그러한 반응이 내게 있는가.

6. 나의 마지막을 보며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기를 기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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