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성벽 재건의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예배 후에 레위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이다.
이 기도는 시편 이외의 성경에 나온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 평가 받는다. 이 기도를 중심으로 신자가 드리는 기도의 핵심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인지
레위인들 기도의 도입 부분에 언급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이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도를 듣는 ‘대상’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인 하나님이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인지는 정말 중요하다. 그 인식이 부족할 때에 발생하는 모습이 기도 시에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왜 중언부언의 기도를 드리는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기도의 응답 여부가 나에게 달려있다는 생각
기도의 응답은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이루어지고,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내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소원하는 것을 열심히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기도와 하나님의 뜻이 맞을 때에 기도 응답의 기쁨을 맛 볼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경우에 따라(!) 하나님께서 내 열심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으나, ‘나의 열심’이 기도의 핵심이 아니다.
성경은 산을 옮길 만한 기적도 내 열심을 기준 삼는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얘기한다(마17: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이유도,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무언가 열심히 해서 그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마음(!)이 충성되었기 때문이다(8절). 이 사실을 안다면, 한 말을 반복해서 나의 열심을 증명하려는 중언부언의 기도는 드리지 않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믿음의 부족
하나님은 내가 구하기 전에 이미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시다. 이것을 믿지 못하니까 행여 하나님이 못 알아 들으실까봐 자꾸 주문 외우듯이 중얼 거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기도에 가려질 것 같은 불안함, 내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 보시기에 급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것 같은 초조함에 쫓기어 계속해서 같은 문장을 반복하며 열심을 내어 기도하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어떠한 방법적인 열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면 (e.g: 금식, 철야, 새벽 기도 등)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는 나름의 ‘공식’을 갖게 되어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잘 들어주시는 기도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각자 저마다의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소통의 관계에 ‘공식’이 존재하는 순간,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는 사라지고, 형식과 모양만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가 구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셨던 좋은 사례가 성경에 등장한다. 그것은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조카 롯을 위한 중보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그는 그곳에 있는 조카 롯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그곳에 의인 10명을 찾을 터이니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실제 자기의 기도 제목인 롯의 안전에 대한 얘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롯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다. 그가 중보기도를 시작한 이유를 아셨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멸망할 때에 천사를 보내어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그것이 바로 나의 필요를 이미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지가 있는 자가 드릴 수 있는 기도의 모습이다.
2.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와 너의 자손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하신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복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이 무언가를 잘해서 칭찬 받을 만한 상황에서 하지 않으셨다. 항상 뭔가 부족하고, 실패했을 때에 나타나서 그에게 자신이 한 약속을 재확인 시켜 주신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한번 택한 자녀를 버리는 일도 없고, 내치는 일도 없으며,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기준과 잣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실패했을 때에도 복의 말씀을 전했던 것은 신앙의 초기 때이다. 이들의 신앙이 성장했을 때에는 아들을 바치라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성장을 위해 우리에게 이 땅의 고난과 역경이라는 것을 허락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자녀들을 강건하게 하기 위한 훈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도 나에게 불변하시다’라는 믿음이 있는 자의 기도는, 기도를 통한 누림의 자리까지 가게 될 것이다.
3. 기도의 양
오늘 본문의 레위인의 기도는 결코 짧은 시간으로 드린 기도가 아니다. 적어도 6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보냈다(3절). 그것은 기도의 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위험하다. 하지만 그것이 기도의 양을 줄이라는 말이 아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해야지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계획과 의도를 잘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부모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자녀가 부모의 심중을 가장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앞서 아브라함 역시 오랜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떼를 쓰지 않고 롯의 처분 마저도 하나님께 맡기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기도의 양이 중요하다. 기도를 많이 해야 나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조율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의 기도의 타입은 어떤 타입인가? e.g: 묵상 기도, 통성 기도, 금식 기도, 철야 기도 etc...
3. 나는 기도를 통해 누리는 복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4. 내가 기도의 문장을 반복하는 내용이 있다면 어떤 이유인가?
5. 하나님이 나의 부족함과 실수에도 버리지 않고, 이끌고 가심을 느낀 경험이 있는가?
6. 나의 기도의 양은 어떠한 편인가? 기도를 많이 했을 때에 적게 했을 때의 나의 신앙의 상태는 어떠한가?
7. 나의 소원을 차마(!) 구하지도 않았는데 채워주신 하나님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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