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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Ⅱ: 보김에서의 통곡. 삿2:1~5절. 03.15.2020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김’이라는 지역에서 하나님의 책망의 소리를 듣고 소리 높여 울고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책하는 하나님과 그에 반응하여 우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교훈 3가지를 살펴보자.

1. 남겨진 가나안 족속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을 모두 몰아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응하지 않고 남겨 둔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시며 ‘결국에는 그들이 자라서 너희를 괴롭히는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3절)’이라고 선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유가 가나안 족속들이 ‘철병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쫓아내지 못했다’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은 것이다. 즉, 안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그들을 노예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농사짓는 법을 몰랐다. 그렇기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정복 후 함께 기거할 수 있는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줬었는데(출23:29), 그들은 한 세대가 지난 후에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들이 섬기는 이방 종교가 이스라엘 땅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놔둔 일이 민족의 종교를 삼키는 일로 커지게 되었다. 나중의 사사의 모습을 보면 이방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안위를 위해 그들을 남겨 놓았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의 문화가 그들에게 물들게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적대하라. 세상 속에 가지 말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속에 우리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문화에 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어느 새 나의 우상이 되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보김의 첫 번째 교훈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의 통곡의 의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들로 인하여 너희가 괴로운 시절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소리를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을 하고 운다. 그리고 제사를 지낸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고 제사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당연히 이 울음은 ‘회개’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뜻은 ‘울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성’이다.

회개는 잘못되어 가던 길을 ‘돌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잘못된 길의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돌아가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울음을 동반한 기도는 그저 ‘신세 한탄’에 불과하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신앙인으로써 마땅히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늘 내가 성경을 몇 장을 읽었다. 기도를 얼마나 오래했다로 자랑하지 그 일이 내 신앙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주어 내가 신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에 대한 삶의 모습이 없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적나라한 모습이요, ‘보김에서의 통곡’이다.

3. 참된 순종의 의미

하나님이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서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요구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라는 명령이다. 그것에 대한 순종을 아주 강력하게 그들에게 요구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안 쫓아내고는 그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가나안 전쟁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일을 주관하신 것은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다(수23:5,9.24:18)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누가 한 일인가? 그것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3절). 그렇다면 하나님이 혼자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여 그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이고,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순종한다는 것이 항상 이스라엘에게 평안과 안위를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결과는 모든 일의 승리와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의 승패여부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인생을 향한 ‘훈련의 목적’에 따라서 달라진다. 분명한 것은 순종할 때에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된다.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없다. 순종하여 행하는 자만이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 놓아 울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들을 향한 질책의 소리만 크게 들리지 이에 앞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겠다(1절)’는 그분의 의지에 대한 말씀을 놓쳤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한다’는 그 약속을 믿고 내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과 결과를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가장 좋은 것은 ‘내 인생 하나님이 책임지겠지’ 하는 배짱이 생기는 것이다. 그 말은 내 인생이 항상 성공한다는 얘기도 아니고, 실패가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며 이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게 있어서 납득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으로써 마땅히 내가 그분의 권위에 순종할 대상이다.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속히 항복하자. 그 신앙이 분명해 진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의 길이 고난이 아닌 축복이요. 그 복을 누리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뒤돌아보니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 있는 세상의 문화는 무엇인가?

3. 내가 하는 종교의 요식행위 중에 타종교와 가장 비슷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4. 기도하다가 눈물을 많이 흘리고 뉘우친 후에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5. 내가 순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왜 그것이 잘 안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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