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025. 고린도전서 강해(5) 로고스: 세상 vs. 하나님. 고전2:1~5, 10~16절
- Soo Yong Lee
- Apr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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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고린도 지역은 헬라 철학이 삶의 중심이었다. 헬라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바로 ‘로고스’라는 단어였다. 우리는 로고스를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할 때에 그 말씀이 ‘로고스’이고, 요한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요1:1)
하지만 당시의 헬라 문화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 로고스가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로고스는 ‘우주의 질서나 이성적인 원리 또는 법칙’이다. 추상적이며 전혀 인격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신약의 저자들이 그 헬라 철학의 로고스를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접목했다. 그렇게 재정의하여 인격적 구원자로 설명을 했다. 그렇다면 세상의 로고스와 하나님의 로고스의 차이는 무엇인가.
● 둘의 차이
1) 세상의 로고스: 헬라 철학의 로고스는 이성, 논리, 지혜를 뜻한다. 당시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이성적 탐구, 지혜(소피아)를 통해 자신 안에 잠든 진리를 깨닫고 궁극적인 실재(이데아)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철학적 논증인 변증법, 명상, 엄격한 자기 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은 지적 엘리트 만이 따라갈 수 있었고, 평범한 사람들은 로고스에 도달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토록 자기 증명을 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로고스’를 선포한다. 이는 헬라의 로고스와 완전히 반대 되는 개념이다.
2) 하나님의 로고스
세상의 로고스는 추상적이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구원에 이르는 자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뿌리를 둔다. 상당히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며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심플하다. 바울은 이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로고스의 핵심이라고 말을 한다.(1:23)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세상의 로고스는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로고스는 인간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가능하며, 인간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세상의 로고스는 인간의 지적 성취로 도달하는 고고한 진리다. 하지만 하나님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간에게 부어진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대속)와 부활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지혜가 없어도, 지적 능력이 없어도 모든 이에게 열려진 자리이다. 단순하다. 예수가 우리의 구주요 주님임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가. 사람의 ‘지혜(소피아)’로는 불가능하다.(2:5) 그렇기에 복음은 오히려 논리에 맞으면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로고스와 하나님의 로고스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말한다.(2:4) 정리하여 말하면,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얻게 된다. 그런데 그 믿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됨을 의미한다.
●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어떤 기적이나 신비로운 현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와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옛 언약이란 율법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깨뜨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새 언약을 약속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외부가 아닌 내 속에 넣어서 내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렘31:31~33) 이것을 이룬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 땅을 떠나시며 한 약속을 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눅24:49) 이 성령이 오셔서 내 안에 들어와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 것. 이 약속의 성취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다.(행2:1)
이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성령은 기도하면 받는다’는 것이다. 아니다. 성령은 우리가 구해서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으로부터 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약속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결과요, 선물이다.
성경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무언가를 제시한 적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약속의 결과이고 성취이다.(행2:33) 기도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상당히 일리 있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은 복음에 반하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명한 것은 ‘기도하라’가 아니었다. ‘기다리라’였다.(행1:4)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이 성령 받기 직전에 기도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성령 받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가운데 행한 것이다. 기도가 조건으로 요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행동과 노력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다.
또한 성령이 내 안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울의 외침이다.
바울은 복음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용납이 될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신자는 십자가와 성령 없이는 완전히 무가치하고 무능한 존재라고 깊이 새기는 자이다. 이를 통하여 ‘내게 자랑할 것이 십자가 밖에 없노라’는 고백으로 복음과 신앙을 쌓아야 한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구원은 무엇인가. 평소에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여 나누어 보라.
3. 자기 자랑을 일삼는 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4. 나는 언제 믿기 시작했는가. 그 믿음과 말씀을 통하여 정립된 믿음에 차이가 있는가
5. 복음의 여러 요소 중에 가장 믿기 힘든 부분은 무엇인가. 왜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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