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 설교를 마치신 후에 하신 그분의 기도이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는가가 자신의 삶의 목적이요, 방향이요, 가치를 말해준다. 그런 의미로 볼 때에 예수님의 이 기도는 그가 이 땅에서 살아온 삶의 가치와 기준이 되는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기도 내용을 통하여 신자가 이 땅에서의 살아갈 방향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앙의 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이 기도의 내용 속에 등장하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살펴본다.
● 영광에 대한 이해
영광은 헬라어로 ‘독사’이다. 이 단어는 고대 헬라의 소피스트들이 화려한 영예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정의와 동일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독사(영광)’에는 또 다른 의미가 추가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늘나라의 속성이 가시적으로 계시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 혹은 인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사(영광)’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아들이 받는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1절) 그렇다면 아들이 받는 영광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요2:4,17:1)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영광은 아주 많은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의미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바로 에베소서 1장 3~14절이다. 이 구절들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고, 대속하시고, 보증하시는 사역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을 소개하며 항상 말미에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구절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언제 영광을 받으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화려함과 잘됨을 통해서가 아니다. 내 모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십자가의 은혜가 가장 잘 드러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리라고 마음을 먹으셨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본인이 영광을 받기로 작정하셨다. 그 영광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 성경이 얘기하는 영광의 큰 차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보람과 의미와 영광은 이 일에 쓰임을 받을 때이다. 이 일에 참여할 때에 그것이 본인에게도 영광이요. 이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 그 누구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도 박수치거나 감동을 받은 이가 없었다.
그렇다. 이 일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벌어지게 될 것이다. 신자가 걷는 삶, 그 길은 외롭거나 비참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길이고, 그 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된다면 신자는 기꺼이 그 길을 감당하고 걸어야 한다.
● 영생에 대한 이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영생한다고 알고 있다.(요3:16) 영생이 무엇인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영생은 신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에게도 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하고 불신자는 지옥에서 영생을 한다. 똑같이 영원히 살지만 거하는 장소가 다른 것이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예수를 믿게 되면 누리게 되는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무엇이라 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얘기한다.(3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온전함이다. 더 이상 무언가를 추가하거나 다듬을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즉, 영생은 하나님이 온전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등장한 단어이다.
헬라어의 ‘안다’는 말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부부관계를 의미한다. 인격과 인격, 존재와 존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됨’을 의미한다.(21절) 즉,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신자와 하나님이 혼연일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영생이다. 그렇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로 꽉 묶여져 있는 상태로 끝까지 가는 것이 영생이고, 우리가 그 일에 초대 받았음을 의미한다.
구원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있다. 헤쳐 나가야 할 길이 있다. 그것을 통하여 온전함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집념이다.(엡4:13)
신자의 신분의 변화는 십자가 앞에서 끝났다. 신자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실제적인 싸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길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필요한 것이다.(2절)
우리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내가 가진 무언가로, 경제력이나, 세상의 지위로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없기에 주눅이 드는 것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더 나은 조건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아니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지어져 가며 그가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영적 싸움에 우리는 초대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길로 이끄실 것이다. 그것이 신자가 누리는 감격의 인생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무엇이었나.
3. 내 주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의 실제 모델이 있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4. 하나님이 우리의 생을 간섭하시고, 지속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게 하는가.
5. 내가 현재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과 길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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