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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2020. 사도행전 강해(27) 안디옥 교회의 탄생. 행11:19~26절

유대인은 이방인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 배설물처럼 여기던 이방인의 첫 교회가 탄생을 했는데 그것은 ‘안디옥 교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안디옥 교회는 초대 교회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던 이 교회는 어떻게 탄생을 하였고, 이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1. 순종한 몇 사람

안디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다수가 아니었다.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졌던 유대인들 중에 ‘몇 사람’이 전했을 뿐이다. 물론, 이들 중 다수가 안디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 이유는 안디옥 사람들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것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인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제국이다.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우상들이 각 도시마다 가득했다. 또한 식민지 백성들을 노예 삼았던 로마인들의 삶의 가치 기준은 쾌락과 환락이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인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차단하여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밑도 끝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단순하게 그 안디옥의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누군지도 모르고 이름도 모를 만큼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저 ‘몇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이해하여 순종한 몇몇의 사람들을 통하여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사의 중요한 일을 감당한 초석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본문에 몇 번을 강조해서 말하였다. 누가는 고작 ‘몇 사람’이 복음을 전했다(20절)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다(21절)는 것을 대조해 놓고, 그 이유를 ‘주의 손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었다(21절).


복음은 우리의 상식, 이성, 생각과 다르다. 그저 단순한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2. 바나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어서 교회가 세워졌다는 얘기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바나바를 파송한다. 당시의 바나바는 열 두 사도도 아니고, 일곱 집사도 아닌 단지 평신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파송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한다. 그것은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4절)

그럼,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때리면 맞고, 손해 봐도 한 없이 퍼주고, 절대로 화를 안 내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에 나오는 ‘의’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사람을 향하여 쓰여진 ‘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이 될 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이다.

바나바는 자기의 밭을 팔아서 구제를 했고, 사울을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해 준 사람이다. 이 두 사례를 보면 그가 참으로 헌신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바나바가 이 일로 인해서 ‘착한 사람’이라고 불림을 받게 된 것이 아니다. 그를 ‘착한 사람’ 그리고 ‘위로자’로 불렀던 이유는, 그가 한 모든 일이 복음과 하나님 나라와 연관이 돼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썼을 것이다.

바나바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다소’에 칩거하고 있던 사울을 찾아가 세상으로 끌어내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이다. 이것이 왜 대단한가. 안디옥하고 다소의 거리는 110마일 정도 떨어졌다.

아마도 육로로 갔을 것인데, 그 길에는 해발 2,000m의 아마노스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을 기꺼이 감당했다. 왜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시간과 물질 그리고 개인적인 불리함을 따지지 않는다. 자신의 명예와 위치보다 복음 전파를 훨씬 더 중요한 인생의 가치로 삼았다. 그것이 바바바가 ‘착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 동기이다.

3. 사울

사울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 편이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이 아니었다. 예수를 믿은 후 그가 가지고 누렸던 모든 것이 다 백지로 돌아갔다.


그나마 자신이 복음 전도자로 즉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으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에 자그마치 13년을 칩거하게 하셨다. 그 동안 아무도 그를 부르는 자도, 만나고자 하는 자도 없었다.

그는 인생의 동굴 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1년, 3년, 5년, 10년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의 끝에 다다랐다. 그런데 그의 앞에 바나바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절망에 빠져 있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같이 안디옥 교회를 섬기자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13년의 시간 동안에 연구했던 성경의 비밀을,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로 온 사울은 그 뒤로 온 맘을 다하여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쏟아 낸다.


왜냐하면 그는 절망의 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이 만났고, 13년의 시간을 다소에 묻어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셨다.

이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는 점점 부흥한다. 당시의 교회는 지금과는 달랐다. 동굴교회이다. 문 앞에 파수꾼을 두고 예배를 보다가 박해자가 오면 비상 출구로 피신을 했었다. 그러다가 행여 잡히면 화형을 당하던지 맹수의 밥이 되었다.


그것이 당시의 예배의 모습이고 이렇게해서 얻어진 이름이 ‘그리스도 인’이다. 오늘날 우리가 편히 드리고 있는 이 예배와 목숨을 바꾸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의 개념과 오늘 날의 우리와는 달랐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윤리와 도덕’을 기준 삼고, 자신의 의와 거룩을 목표 삼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반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얻고 누리는 구원의 복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것이라는 것을 밝히 아는 자.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복음을 아는 자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지금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3. 내가 바나바의 위치였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것 같은 것은 무엇인가. 왜 그가 대단하다고 느끼는가.

4. 내가 하나님의 인도와 계획을 신뢰하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만일 선(line)이 있다면 어느 부분인가.

5. 내가 사울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예:고향에 있을 때, 바나바가 손을 내밀었을 때...)

6. 오늘의 나의 예배의 자세는 어떠한가. 각자의 솔직한 마음을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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