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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2020. 사도행전 강해(26) 베드로의 변증. 행11:1~18절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했다.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베드로를 심하게 비난했다. 그 이유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이방인과 교제를 했기 때문이었다. 율법을 깬 것이다. 그 때 베드로는 본인의 변증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했고 결국에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베드로의 일에 동의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어떤 부분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가.

1.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가 환상을 봤다. 보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유대인이 결코 먹지 않는 부정한 것들이 가득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먹으라고 하셨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 그럴 수 없다’고 반응했다.


이 모습이 딱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가고, 유대인들이 속되다 하는 직업을 가진 무두장이의 집에 자면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였다.

성경이 이런 고집스러운 베드로를 우리에게 자주 등장시키는 것에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과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이 베드로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꽉 막힌 사람이었지만,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 안으로 돌아올 개연성이 많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없었고,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현대의 신앙인이 가진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은 ‘열심을 내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복을 받은 자이기에 열심을 내는 것’이다. 나의 헌신과 열정이 복음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내가 받을 수 있는 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이란,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덧붙이거나 하나님의 어떤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작업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이 목적하시는 바대로 고쳐 나가는 작업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품, 원리, 방법, 목표를 붙잡는 싸움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소원의 성취’라는 것은 이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작용되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신앙의 근본 원리나 방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을,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렵지만 내가 물질과 시간을 드렸다면 내가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다. 상한 심령이란 산산이 부서진 마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선에 대한 요구는 있는데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상한 심령이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항상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는 것은 상한 마음이 아니다. ‘내 속에는 악 밖에 없구나. 내가 주를 위하여 꺼내 놓는 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를 깨달아야 한다.


처절하게 낮아진 그 약함의 자리, 나의 그 약함에 그리스도의 강함이 덧입혀지는 것이다. ‘나는 안 된다’는 그 파산선고를 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실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을 넘어선 다른 차원에서의 신앙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길은 눈물의 길이 아니라 나중을 기약하는 배짱의 길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의 현실 속에서 어려움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이다. 이 진리 속에서 제대로 누리고, 바로 확인하고, 감사로 주님께 올려드리자. 이 때에 지금의 현실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2. 물 침례 vs. 성령 침례

물 침례와 성령 침례의 구분을 알아야 현재 나의 신앙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물 침례와 성령 침례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특별히 물 침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는 구원과 크게 상관없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1) 물 침례: 침례는 ‘연합’을 상징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객체를 하나로 묶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침례이다. 성령 침례는 성령과 하나가 되어 그가 우리 안에 내주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도의 침례를 통해 모두가 한몸이 된다. 그렇다면, 물 침례는 누가 줬는가. 침례 요한이다. 그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사해줄 권리가 없다. 그도 백성들에게 죄를 사한다고 하지 않았다. ‘회개케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마3:11)

이로 인해 요한의 침례는 인간이 주는 침례로써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이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신자는 그 자리에서 끝나면 안 된다. 진정한 믿음의 완성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지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성령 침례’이다.

2) 성령 침례: 우리는 이 성령 침례를 통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을 우리 몸이 살게 되는 것이다(롬8:10.11). 요한의 침례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침례라면, 성령 침례는 죄인인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고백의 차원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성령 침례이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내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통하여 내 현재의 신앙의 위치를 확인하자. 신자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신에 대한 절망과 좌절을 통하여 내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고백을 하는 자이다. 만일 이 고백이 없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를 고된 훈련의 자리로 이끄실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과 내게 허락하신 복의 풍성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신앙의 색깔의 차이로 누군가와 대립한 적이 있었는가. 베드로의 태도를 보고 배울 점은 무엇인가

3. 교우들 간에 서로 다름으로 인한 유익을 나누어 보라.

4. 베드로는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지탄 받는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5. 물 침례와 성령 침례를 배우기 전과 후의 차이가 있는가.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6. ‘신앙은 배짱의 길이다’라는 말을 통하여 무엇을 배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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