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사사기의 후속편이다.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이기 때문에 본문 역시 사사시대의 연장이다. 사사시대 때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그것은 ‘죄 -> 전쟁패배(심판) -> 간구(회개) -> 전쟁승리(구원) -> 망각 -> 죄’의 계속된 반복이 사사기이다.
그런데 본문에 이스라엘이 승리 전에 회개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럼, 그 전에는 뭐가 있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전쟁패배(심판)이다.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본문을 봐야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 배경은 아벡 전쟁(삼4장)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아벡에 있던 블레셋 사람과 전쟁을 한다. 이 때의 패배로 이스라엘 군인 4천명이 죽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패배의 이유를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지고와서 다시 전쟁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3만 명이 죽고 언약궤마저 블레셋군에게 빼앗긴다.
빼앗긴 언약궤는 블레셋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닌다. 언약궤가 가는 곳 마다 재앙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 언약궤가 도착한 곳이 ‘기럇여아림’이다.(1절) 그 뒤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이 마치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전쟁은 ‘기럇여아림’이 아닌 ‘미스바’에서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약궤가 없을 때 전쟁에 승리한 것이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처음 아벡 전투에서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온 이유가 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이 직접 쓰신 돌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언약궤를 앞세웠을 때에 요단강물이 멈췄었고,(수4:7) 여리고 성도 칼 한번 쓰지 않고 무너졌다.(수6:6)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식이 생겼다. 그것은 언약궤가 있으면 기적과 형통함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공식으로 인하여 이들이 어느 곳이든지 언약궤를 필요로 했다. 언약궤 그 자체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 언약궤가 마치 샤머니즘의 부적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들은 하나님을 인격으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며 나와 말씀을 하시고 내 인생에 목적을 두고 계신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이 깃들었다고 믿었던 언약궤를 찾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 쓰임 받은 물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게 우리 신자들 가운데는 이런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성경구절이 담긴 액자, 차에 걸어둔 십자가가 행운을 안겨 준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신앙이 자리 잡았는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는 전통 무속 신앙이 그대로 기독교 신앙으로 자리 옮김을 했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속 신앙의 신이 그대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그것은 성경이다. 성경 안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대표적으로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났다.(행19:12) 이로 인해 이런 손수건이 언약궤처럼 변했다. 사실 손수건은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도구로 사용했을 뿐인데 그 손수건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코 그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은 지병이 있었다. 그런데 그 병을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해도 고치지 못했었다.(고후12:8) 무슨 뜻인가. 손수건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기적은 단회적으로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뜻이 있을 때에 사용한 것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공식을 깨기 위하여 언약궤가 있을 때에 전쟁에서 패배를 겪게 하셨다. 이들의 시선이 언약궤에서 하나님으로 옮기기 위함이다. 그럼, 바른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나의 경험이 쌓일 때에 바른 신앙을 가진 수 있다.
● 온전한 믿음: 하나님을 아는 믿음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 섬기라고 명한다.(3절) 이는 곧 그들이 이방신도 함께 섬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현재의 많은 신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 갈등을 빚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진 현실적인 문제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라는, 현실과 말씀 사이의 괴리를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머뭇거리며, 세상의 모든 것을 약속하는 신들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도 버리지 못하는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하나님 만 섬기라’는 명령에 죄를 회개하고 금식을 한다. 금식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한다는 고백적 차원을 담은 기도이다. 이 원리를 놓친 채 내 소원을 이루어내기 위한 방법적인 차원으로 이를 행한다면, 나쁜 신앙으로 자라게 된다.
성경에는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한다. 이 말은 ‘기도를 쌓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의미다. 어제 기도를 했어도 오늘 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전에 많은 기도를 했을지라도 오늘 하나님 앞에 구해야 오늘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기도가 시간적인 분량의 대비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완전히 복음에 반하는 것이다.
만일 내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내가 요구한 것에 대한 결과에 의한 것이라면,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재로 인하여 내가 느끼지도, 인지하지도 못할 뿐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아는데서 비롯된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서 경험되고, 체험될 때에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의 신앙적 애착 물건은 무엇인가. 혹시 그것이 나에게 부적처럼 사용될 때가 있었는가.
3. 말씀을 듣고 내 신앙의 미신적 요소가 있었다고 느끼는 가. 어느 부분에서 그러한가.
4. 기도가 쌓인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5. 내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의 주된 도구는 무엇인가. e.g) 성경, 경험, 설교, 간증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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