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유월절 엿새 전에 다시 베다니를 방문하여 잔치에 참석하셨다. 그 잔치에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 나사로의 모습은 신자가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는 핵심 내용을 잘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이 모습을 죽었던 우리를(과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현재)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것(미래)이라 하였다.(엡2:5,6)
이 잔치 때에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 머리로 그의 발을 씻겼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 향유를 부은 의미
발을 씻기는 것은 당시 중동 문화였다. 특별히 부자들은 종들이 찾아온 손님의 발을 씻겼다. 그렇기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은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 분은 나의 주인입니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향유를 붓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당시에는 향유를 두 가지 경우에 사용했다. 먼저는, 일상생활에서 여인들이 향수로 사용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시체에 향유를 발랐다. 시체 썩는 냄새를 중화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사용한 향유는 나드 한 근(340g)이었다. 그것은 300 데나리온으로 노동자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가치였다. 예수님은 이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예수님의 장례(죽음)를 예비한 것’이라고 하셨다.(7절)
이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녀는 이 섬김과 헌신을 통하여 주께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목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가진 사랑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것이 다였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복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복이 다르다. 기독교의 복은 항상 십자가로 출발하고, 십자가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갖는 그 어떤 기쁨과 자랑도 십자가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자기가 믿고 바라는 것을 얻고자 추구하는 일반 샤머니즘과 다를 것이 없다.
신자는 내가 주께 드리는 헌신을 세상 것으로 보상 받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들이 결코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과 우리의 만족과 행복은 결코 한없이 비례하지 않는다.
이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쓰셨다. 그는 세상적으로 전혀 부러울 것이 없는 자였다. 그는 학력, 지위, 명예 등을 다 갖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빌3:7,8)고 하였다. 그것이 도리에 내게 악을 끼치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는 그가 가진 재능을 예수를 믿은 후에는 모두 다 주를 위하여 쏟아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의 것들이 다 해롭다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추구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헌금과 봉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반드시 봉사와 헌신이 따라온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넘치는 자는 오히려 율법이 기준하는 것을 넘어서는 헌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자의 말로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하여 알 수 있다.
● 나귀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
예수님이 입성할 때에 수 많은 백성들이 종료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격렬하게 환영했다. 그랬던 그들이 왜 며칠 사이가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는가.(요19:6,15)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그들이 소원했던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구원의 백성으로 믿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식민지 상황을 끝내줄 메시야가 도래하여 자신들을 현재의 식민지 상황에서 반드시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원자에 대한 인식이 없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계산해야 하는 죄인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도 동일하다. 기독교 신앙이 ‘죄사함’을 믿음의 본질로 삼는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행위로 내 소원을 채우는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는 이유는 이들의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러 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이것을 기본과 근본으로 가지지 못하면 단지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신앙을 도입하는 자로 자라게 될 것이다.
현재의 나의 신앙을 확인하라. 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늘을 헌신하는 이유라면 그것은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이미 구원 받은 자라는 믿음이 헌신을 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라면 내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리아는 단지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의 표현으로 향유를 부은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십자가 죽음에 동참한 것으로 여기셨다.(7절) 곧, 마리아의 향유 도유는 예수가 죽음을 이기는 자라는 것을 잘 아는 자에게서 보이는 마땅한 반응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교회의 봉사와 헌금은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3. 내가 생각하는 헌금은 무엇이고 헌금을 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4. 내가 섬기는 가운데 재정의 손해가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에 섬김을 계속 할 수 있는가.
5.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을 목격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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