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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22. 아브라함의 이야기(8) 언약의 표징. 창17:1~11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기대했다. 하자만 10년 동안 자녀가 없자 여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얻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자그마치 적어도 13년 이상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이 하나님의 13년의 침묵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침묵은 영적인 깊이와 상관이 있다. 깊이 있는 영성은 결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시간을 거쳐서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한다. 참다운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니, 그 시간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가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인지가 가능하다.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 만물은 시간, 공간과 물질을 의미한다. (e.g: 태초(시간)에 하나님이 천(공간) 지(물질)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존재했던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만물을 위해서이다. 만물은 존재의 유지를 위하여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 받지 않으신다. 시간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 공간 및 물질을 창조한 후에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의 권한에 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그 어려운 고통의 무게를 다 감당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하루와 천년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벧후3:8)

이 침묵의 13년은 아브라함에게 아주 긴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같은 시기가 하나님에게도 ‘인고의 시간’이었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적인 인본주의 관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는 인간을 향하여 아파하는 마음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분은 인고(忍苦)하시는 분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시간에 묶여서 고통 받는 분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을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시간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시간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신앙의 깊이를 더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13년의 기간을 통하여 깊이 있는 신앙의 사람으로 빚어진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시간의 길이가 신앙이 깊어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다. 그 시간의 길이가 길어지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욱 붙잡고,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이다.

신앙이 깊어지려면 선행되어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 있다. 그것은 자기부인이다.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는 고백 이전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처절한 고백이 우선이 되어야 참 믿음의 시작이 가능하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침묵의 13년의 기간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신앙으로 성숙해지지 않았다. 실제는 정반대였다. 하나님이 ‘네가 번성하고,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에 하나님을 비웃었다. 그리고 오히려 현재 있는 이스마엘이나 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니까, 생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자신과 아내 사래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이 그에게 한 말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였다.(1절) ‘넌 못해.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가능해’라는 뜻이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다. 내가 결코 이룰 수 없고, 가능성도 없는데 하나님이 완전히 혼자서 이룬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약속을 하셨다. 온통 내가 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신과 수고는 보상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내게 쏟아 부어주시는 그 한량없는 은혜를 아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과 표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한 후에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요청한다. 첫 번째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이다. 여기서 ‘내 앞에서 행하다’라는 뜻은 무언가 행함을 명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 앞에서 걸으라’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목적을 두고 걷는 것이 아닌 여유를 갖는 산책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저 단순한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완전하라’는 말은 순수함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순수함으로 교제하며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결국에는 우리가 완전함에 이르는 것은 창세로부터 계속적으로 행위가 아님을 얘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할례를 행하라’이다. 할례는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이다. 가뜩이나 100세의 나이가 다되어서 자연적 생산이 불가능한 아브라함에게 그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상징적인 의식을 명하신다. 무슨 뜻인가. 내 자신이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할례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묘사한다.(골2:11) 구원 받은 증거로 할례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언약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받아야 할 할례는 구약의 손으로 행한 할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대속의 피를 믿는 것이 곧 우리의 할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고 경건과 절제와 거룩을 추구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표피를 베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할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자의 내용은 상식적인 물리적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그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자가 오늘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가. 각자의 경험을 나누어 보라

3. 하나님께서 왜 ‘시간’을 창조하셨을까. 그 목적과 이유는 무엇일 것 같은가.

4. 수입 중의 십의 일을 드리는 것과 내가 받은 은혜에 반하여 드리는 것과 어느 것이 옳은 것 같은가. 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셨을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라.

5. 하나님과 동행(walk before God)이 어렵다면 왜 그런지 자신의 경우를 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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