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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022. 아브라함의 이야기(9) 할례, 그 이후의 삶. 창18:1~16절

앞서 13장에서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었다. 롯은 화려한 소돔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택했다. 이 둘의 인생의 방향과 결과는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가. 먼저 18장은 아브라함의 인생의 길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13년 만에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할례를 행했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할례를 행한 후의 아브라함의 모습은 사뭇 이전과 많이 변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람을 섬기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 섬김의 삶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서 쉬고 있을 때에 3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그를 찾아온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임을 전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아주 극진히 섬긴다.(히13:2) 가장 좋은 음식으로, 가장 시원한 곳에서, 가장 겸손하게 섬긴다.

성경의 저자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후에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그 구원을 얻은 자, 그 성도의 모습은 반드시 이러한 섬기는 삶의 자세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 주의 거룩함을 입은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후에는 가야할 길이 있다. 그것은 이제는 자기를 위하여 살던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나그네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최선의 것으로 섬겼다. 그는 이를 통하여 그것이 신자가 가야할 길임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관념이나 이상의 싸움이 아니다. 거룩한 생각과 기가 막히게 훌륭한 인생의 답변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내 삶의 태도이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집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하셨다.(마22:36~40) 이것을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바울은 이 사랑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정의하였다. 영적인 은사가 있어도, 아주 박식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또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이렇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의 구분을 사랑으로 기준 한다. 그렇다면 사랑의 유무는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그것은 행위다. 말이나 생각은 있으나 행위가 따라오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헌신적으로 이웃을 섬기는 자가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는 희생이 있더라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한다.(고전13:3) 구제와 희생은 분명히 행위이다. 그런데 행위가 따르더라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은 꽤나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무엇인가.

요한은 기독교의 사랑은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요일4:16)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분 안에 녹아 있는 자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 만이 기독교 사랑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얘기하는 사랑은 윤리나 도덕 혹은 고귀한 덕목이라든가 따뜻한 마음 그 이상의 무엇이다.

내가 남을 섬기겠다고 노력하고, 결심하고, 의지로 붙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그리스도의 고귀하고도 감격적인 사랑을 체험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행동들이 기독교 사랑이다.


그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파생된 섬김이 아닌, 율법을 준수하는 의미의 섬김은 내게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고전13:2) 그리스도의 사랑이 차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방향이 있다. 그것은 중보자의 삶이다.

● 중보자의 삶

기도할 때에 여전히 나를 위한 기도에만 머물고 있다면 아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어주고 계신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체험한다. 그런데 기도의 가장 우선해야할 부분은 ‘내’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이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더하는 가장 확실한 기도라 가르치셨다.(마6:33)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의는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이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다. 믿는 성도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하는 공동체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중보기도이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면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를 한다. 이는 이 죄악된 세상에 사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그 예수님의 애타는 기도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 역시 내 개인의 유익과 소원이 아닌 남을 위하여 피가 마르도록 기도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이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로 하나님이 롯을 건지신다. 롯은 타락한 도시 소돔을 떠나지 못하는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의로운 자라 칭한다.(벧후2:7)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가 아닌 아브라함의 공로 때문이다.(창19:29) 아브라함의 롯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악 가운데 젖어 살면서 육신의 정욕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 때문이다. 그 타인을 위한 중보 기도의 사역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것이 그리스도 십자가 할례를 받은 성도의 삶이요. 하나님께 부름 받은 백성과 자녀들의 삶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누군가를 전심으로 섬겼던 기억이 있는가. 언제였으며, 그것을 통하여 내가 얻은 유익은 무엇인가.

3.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남을 보고 어떻게 아는가.

4. 왜 중보 기도가 믿는 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5. 중보 기도를 통하여 내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복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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