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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2021. 사도행전 강해(50) 예수, 그 마지막 보루. 행21:17~27절

바울은 죽기를 각오하고 담대히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예루살렘 형제들과의 만남

바울은 그곳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총 책임자인 야고보를 포함한 믿음의 형제들을 만난다. 이는 15장 이후로 10년 만에 만나는 것이다. 야고보가 총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그를 믿지 않았었기 때문이다.(요7:5)

불신자였던 그가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의 총책임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고전15:7) 자신의 형인 예수가 메시야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 이후에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땅이 목적이 아니다. 죽음 이후에 분명히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

사후의 세계와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야고보를 묵상하라. 만일 신약 성경을 한 사람이 썼다면 야고보가 예수를 믿게 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의도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고보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한 사람은 요한이요(요7:5), 그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한 것은 바울이요(고전15:7),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누가이다.(행21;18)

누군가 일부로 야고보를 위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다. 모두 다 다른 장소, 다른 시기에 썼는데 이를 종합하여 보니 불신자였던 야고보가 믿음의 형제 중에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확인이 된 것이다. 불신자였던 그가 예수를 믿었다면, 어떤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바울의 선교 보고

바울의 선교 보고를 듣고 예루살렘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왜 바울을 칭찬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가. 그것은 바울이 이 모든 사역을 자신의 공로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로 보고했기 때문이다.(19절)

그렇다. 우리의 일은 우리의 지혜와 전략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에 일을 하신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예정이 돼있고, 하나님이 일을 다 하신다면, 우리가 할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은 우리의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침 몇 시에 일어나고, 무슨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는 것이 예정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예정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부분이다. 구원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이루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의 하나님의 개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설득하신다. 그 과정은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을 거시고, 위로, 매, 야단의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고 가시는 목표는 정해져 있지만, 그것을 이루는 과정은 전적인 나의 자유의지로 이루신다.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이 19절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는데 그의 사역을 ‘통하여’ 일을 하셨다고 얘기한다.(19절) 그러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혼자 이루시지만, 우리의 일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혼자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개입시키고, 우리와 함께 일을 함으로 당신의 뜻을 ‘우리를 통하여’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된다.

● 그들의 제안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 때에 죽기를 각오하고 왔다. 그런데 오순절 때이라 계속해서 바울과 대립을 해 왔던 율법주의 바리새파 신자들이 수만 명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이들은 바울을 두 가지 이유로 공격했다. 하나는, 바울이 율법이 필요 없다(모세를 배반했다)고 말을 했으며, 다른 하나는 아이들에게 할례와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21절)

이들이 공격하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한 번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우리의 구원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이룬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마23:23)

바울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꾸준히 율법을 준수해왔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고(16:3), 서원한 일로 인하여 머리를 깎은 일이 있고(18:18), 빌립보에서는 무교절을 지키고(20:6),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왔다.(20:16) 이는 바울이 계속해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야고보 사도가 바울에게 나실인 네 명과 함께 정결의식을 행하고 그들의 비용을 대라고 권한다. 저들에게 그가 율법을 준수하는 자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것은 바울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이 말을 들은 바울은 뜻밖에 야고보와 논쟁치 않고 수락하여 행한다.

이것은 죽기를 각오한 바울의 결심이 흔들려서가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이다(고전9:19~22).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복음 안에 거할 수 있다면 자신의 자존심도, 논리도, 이론도 다 양보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기독교의 비본질적인 것은 다 양보한다. 하지만 가장 본질인 예수는 양보하지 않는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믿음의 형제인 바리새파 신자들에게는 다 양보하는데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끝까지 맞서고 결국에는 감옥까지 간다. 왜인가. 예수는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신자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왜 수많은 고초와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갔는가. 예수를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요. 신자에게 요구되는 믿음의 본질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를 생각 나는 대로 말해보라

3. 성경을 읽을 때에 힘든 점과 좋은 점은 무엇인가.

4. 쎌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두고 교회에 어떤 사역이 어울릴지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라

5. 누군가 나를 오해할 때에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6. 누군가 교회와 기독교를 비판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어디까지 수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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