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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2022. 에베소서 강해(14)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장 1~14절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다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석할 때에 당시 이방인의 문화를 이해하고 읽지 않으면 오해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5절이다.

5절에서는 음행, 더러움, 탐심,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이 구절을 두고 보면 분명히 도덕적인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바, 우리의 구원은 행위로 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는다. 이것은 5절의 내용과 상충한다. 그럼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이 부분이 바로 당시의 문화적 배경의 대입이 없이 읽을 때에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의 에베소에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여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음란, 더러움, 탐심이 등장한다.


이 세 단어는 모두 성적인 것과 연관이 되어 있는 단어로 당시의 이방신을 제사하는 방법이 거의 다 그러했다. 비슷한 예로 고린도 지역은 이방성전에서 여사제와 성관계를 함으로 그들의 신을 섬겼다.

바울은 이 세 단어를 우상 숭배와 연결했다. 그러니까, 음행, 더러움, 탐심을 행하는 자가 곧 우상 숭배자라고 한 것이다. 즉, 이 세 가지를 행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자들이기에 불신자들 곧,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5절) 본문을 가지고 불신자와 신자의 삶을 비교해 본다.

● 불신자의 삶

우상숭배자들은 음행을 자신의 신을 섬기는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이 말은 곧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 그것을 신을 섬기는 의식이라는 것으로 대의적 명분 삼았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취하면서 그것을 대의로 묻어 버리는 삶.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

이 문화는 우리의 교회 안에서도 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무서움이 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행하지만 실제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이권, 유익과 연관이 있기에 행하는 것들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대의로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과 지극히 대조가 되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 신자의 삶

바울은 신자의 삶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장 잘 보여준 대표적인 예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얘기한다. 그 분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어떤 방법인가. 그것은 본인이 좋아하고 유익이 되는 방법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오로지 타인을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망가지고, 부서지고, 찢기고, 상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와 신자의 삶은 나의 만족과 유익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희생을 통하여 전적으로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예배요, 신자가 가야할 삶의 방향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왜 예수를 믿는가?’라고 물으면 아마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복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예수를 믿은 후에 우리가 걷는 길은 꽃길이 아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눅9:58) 무슨 말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통하여 타인이 유익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그 길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잊을 때에 신앙의 본질이 무너진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말씀대로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럼 신자는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행하는 것으로 복을 받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혹자는 구약 시대에는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복을 얻었지만, 신약 시대는 믿음으로 복을 받기에 말씀(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신자는 말씀을 지켜야 복을 얻는다. 지키지 못하면 저주요, 재앙이고,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는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을 내가 지키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붙잡아야 복을 받았다. 그런데 신약은 그 모든 말씀에 대한 순종을 나대신 예수가 해내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나를 대신해서 그가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가 율법을 완성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다. 오늘 날에도 말씀대로 살아야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는 순수한 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행한 대로 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인과율이 낳은 인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복과 구원을 얻지 않는다. 오로지 전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이 모든 것을 이미 얻고 누리게 되었다. 이것을 놓치면 복음을 놓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로 합격 여부를 결정했다. 그것이 잣대다. 이것을 못 지키면 복도 구원도 없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합격된 자로써 말씀을 순종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이 모든 것을 행하시고 이루셨다는 믿음으로 더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자리로 인도받는다. 그곳에서 복을 누리기 위함으로 말씀에 대한 순종이 제시된다. 그 이유로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우리가 말씀을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의 복을 우리는 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복의 조건을 충족했기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신자로써의 삶을 잘 가고 있다는 격려와 바르게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방향 제시 차원으로 주어진 은혜이다.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달으면 우리가 현재 받는 복이 영적인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에 대한 것조차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한 복을 통하여 우리가 현재 누리는 것이 영과 육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복을 추구하라 말하지 않는다. 거룩을 얘기한다.(9절) 이미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성경이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복이 아니다. 거룩이다. 우리를 ‘빛의 자녀들’이라 칭한다.


빛이란 어둠을 전제로 한다. 빛은 어둠 속에 있어야 빛으로서의 가치가 드러난다. 이제 혼자서 누리는 고즈넉함과 여유에서 나오라. 그리고 세상으로 들어가 빛을 발하라. 그것이 빛의 자녀로 사는 신자가 사는 목적이요 방향이다.


● 나눔 질문

1.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것 중에 실제적으로는 개인의 유익과 이익에 관계된 일을 본 일이 있는가.

2. ‘당신은 예수를 왜 믿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할 것인가

3. 말씀대로 살지 않는데 세상적인 복을 누리는 자와 말씀대로 살면서 세상적인 복이 없는 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4.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무엇을 통해서인가. 또한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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