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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3.2021. 사도행전 강해(48) 눈물의 의미. 행20:17~32절

Updated: Jun 18, 2021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장 24절은 바울이 행한 복음 사역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다. 동시에 예수를 믿는 자의 사명과, 신자가 걷는 인생길은 어떤 것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정의이다. 이 바울의 고백이 마땅한 신자의 길이라고 믿는가. 만일 그렇다면,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와 이 고백이 정확히 일치하는가.

이 질문은 ‘내가 지금 이 길을 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결코 흉내도 못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신자는 인생길에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그 때, ‘내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 이 질문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거나, 우선 되어 있지 않는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기독교가 가진 본질적인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서 앗소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에 도착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부분이 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약 100마일의 거리를 제자들은 배를 타고 보내고, 자신은 홀로 걸어간다. 왜 그랬을까... 학자들은 아마도 바로 이 무렵에, 즉 드로아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바울이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음성인가. 그것은 ‘네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고 고초를 겪게 될 것’이라는 음성이다.(23절)

앞서 바울의 본래 계획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에게 선교 보고를 한 후에 자신의 본거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 로마를 가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선교 비전이었다. 그러나 드로아를 떠나려는 순간 성령께서 바울의 목적지가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임을 알려 준 것이다.

이 메시지는 바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를 지나서 땅 끝이라 여겼던 스페인까지 가려고 했는데 이제 감옥에 가면 실제적으로 더 이상 전도 사역을 할 수 없을 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심적인 부담과 마음의 번민이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택했다. 그 100 마일의 길을 혼자 걸으며 이 고난의 길을 피할지, 갈 것인지 고민하며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단한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노라고.(24절)

이 결심이 서자 바울은 에베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밀레도를 향한다. 왜냐하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앞으로 오순절까지는 25일이 남아 있어서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행여 무슨 변수로 인하여 늦어질까봐 그 고난의 길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왜인가. 성령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 바울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을 알았다. 너무 괴로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갖고, 몸부림치며 기도하셨다. 그 만남 후에는 그는 알았다. 그것이 자신의 길임을 그 후에는 적극적으로 그 길을 걸어 가셨다.(마26:46,50)

위의 두 사례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신앙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내 삶의 유익과 안전과 번영을 위하여 내가 가진 신앙을 도입한다. 내 소원과 바람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얼마나 많은 열심과 열정이 주께 있는가를 무의식적으로 하나님 앞에 증명하고자 한다. 그것을 통하여 이 땅의 성공, 명예, 물질, 건강을 보상 받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생활이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냐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을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의 싸움이라 말하고 있다.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의 문제이다.

● 바울의 고별 설교

이 고별 설교의 특징은 ‘눈물’이다. 바울은 목양을 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음을 시사하고, 에베소 장로들과 헤어질 때 역시 크게 운다. 왜 우는가.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알기에 우는 것이다. 바울은 그 고난의 길을 피할 수 있는 수 많은 변명이 있다. 하지만, 간다. 왜냐하면, 성령으로부터 온 음성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신앙이 좋으면 모든 주변의 상황이 변하여 내가 꿈꾸던 것으로 바뀌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아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은 눈물의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변화시키기 원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내가 모든 것을 이기는 자로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성경 연구로도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을 직접 몸으로 겪어야 한다. 비천, 풍부, 배부름, 배고픔, 궁핍을 통해서 세상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된다. 이것을 겪은 자만이 웃을 수 있다.(빌4:12) 이것은 신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현실이다.

● 교회를 주신 이유

우리는 교회를 선택할 때에 내가 이 교회를 통해서 어떤 유익을 누릴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 그 기준은 좋은 설교, 탄탄한 주일학교, 비슷한 연배의 유무 등으로 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내 유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교회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애기한다.(28절)

바울은 교회(성도)를 보살필 것을 당부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자기’를 위함이고 ‘양떼’를 위함이다. 양 떼를 위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함은 무슨 의미인가. 아이러니 하게 교회에서 보살핌만을 받으면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 신앙의 성장은 내가 누군가를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할 때에 그것이 오히려 나의 유익이 되고 실제적인 성장을 가지고 온다.

특별히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신앙의 성장은 돌봄에 대한 보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돌봄에 대한 배신, 상처 잔혹한 말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인격으로 자라난다.

● 사도 바울의 부탁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주와 말씀에 부탁한다. 이 말은 말씀을 주문과 부적삼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 말씀 앞에 항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선포되고 찾아오는 모든 신자들이 말씀에 항복하는 것이 교회의 교회된 가치이고,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신앙은 나의 인격과 성숙을 요구하는 싸움이다. 이것은 삶의 현장에서 내가 견디고 버티고, 이겨야 신앙의 완성된 자리로 가게 될 것이다. 산속에 들어가는 명상으로, 굴속에서 안 나오는 기도로, 말씀을 연구하는 묵상의 자리에서 오래 머물지 말자. 삶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이겨내는 성실한 삶의 과정이 빠져 있는 것은 다 가짜이다. 온전한 신자의 모습으로 교회를 돌보는 자리에 다함께 서는 것. 그것이 신자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24절의 바울의 고백과 내가 예수 믿는 이유를 매치하여 말해 보라. 어떤 면이 같고, 어떤 면이 다른가.

3.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성령이 요구할 때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e.g: 내 소원을 지속적으로 아뢴다. 시험이라 생각하고 이겨낸다. 교회를 떠난다 etc...)

4. 가고 싶지 않지만 눈물로 순종한 개인의 경험 혹은 타인의 경험을 알고 있는가. 결과는 어떠한가.

5. 내가 교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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