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의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하고 믿은 후의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먼저, 옛 사람의 특징을 살펴본다.
● 옛 사람의 특징
바울은 이방인(불신자)은 ‘허망’하고 ‘방탕’하다고 말한다.(17,19절) 허망함이란 ‘생각이나 계획이 없고, 무모하다’는 뜻이고, 방탕하다는 뜻은 ‘무절제, 호색, 음란, 허비’를 의미한다. 그럼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신자는 모두가 모든 일을 계획성 있게 행하고, 삶을 절제하며, 음란에서 벗어난 자들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이 말한 이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상식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바울이 기준 삼은 ‘허망과 방탕’은 무슨 의미인가. 이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하는 단어이다.(18절) 즉, 불신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과 생각이 없고,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지 않은 채로 많은 것을 낭비하고, 허비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신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자답게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면, 남에게 본이 되는 삶을 기준한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곧으며, 사회적으로 모범을 이루는 바른 삶을 추구한다. 또한 형편이 되는 대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한다.
그렇다. 신자는 마땅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 기준은 불신자들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산다. 무슨 말인가. 내가 절제하고 규모 있게 사는 것, 이 사회와 소외된 자를 위하여 사는 것이 결코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과 연관이 되고 관련이 있을 때에만이 그의 행동이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18절)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이 허망하고 방탕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전 세계 모든 사람으로부터 본이 되는 삶을 살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과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그는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불신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라 한다.(18절) 이 말은 나는 하나님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미련한 생각을 의미한다. 이로 인하여 그 어떤 복음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이 완고한 상태이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은 불신자이다. 예외가 없다.
신자는 내가 무엇을 남겼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느냐’이다. 이 인식의 문제는 내 행위나, 인격과 성품의 변화 보다 훨씬 앞에 있다. 각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결코 눈에 드러나는 현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세상에는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세상의 성공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 흙수저는 금수저를 이기기가 참 어렵다. 어느 분야에 있어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있다. 왜냐하면, 금수저와 흙수저는 출생할 때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금수저는 자기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갖고 있는 집안의 재력이 있다. 이로 인해 어려서부터 보통의 사람들보다 용이하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반면에 흙수저는 빈곤한 환경으로 인하여 열악한 것으로 시작하게 되고, 금수저와 비교하여 쉽게 성공을 이루기가 어렵다.
이런 구조는 성품에서도 동일하다. 성품도 출생할 때부터 완전히 다른 DNA를 가지고 출발한다. 부모가 온유하고, 겸손하고, 인내와 긍정적인 사람은, 그들의 자녀들도 대부분 그러하다. 반면에 부모가 다혈질이고, 인내가 부족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경우는 대부분 그들의 자녀들 역시 그러하다. 이 두 사람의 성품은 태생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인내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어떤 사람은 인내하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품적인 부분을 수치화하고 계량화해서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이 그리 행하시면, 누군가는 쉽게 그 성품을 이룰 수 있고,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군가와 비교해서 기독교인이라면 저 정도 수준은 돼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방향성이 있을 뿐이다. 각자의 개인에게 주어진 수준에서 시작하여 얼만큼 성장했는지를 우리에게 물으신다. 믿기 전과 후를 비교하여 확실한 성품의 진보가 있는가를 물으신다.
모세가 그러하다. 모세는 젊은 시절에 결코 온유하지 않았다. 분노로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고, 하나님께 반항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온 지면의 사람보다 온유하다 하셨다.(민13:3)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시간이 갈수록, 세월이 더해 갈수록 그의 성품에 확실한 진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치화된 성품의 수준을 제시하며 기준 미달이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그럼 어쩔 수 없기에 그냥 두시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를 몰아간다. 끌고 간다. 곁에 서서 우리에게 지속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옛 사람으로부터 변화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바울은 이 에베소서를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고 기도한다. 그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그 길을 기꺼이 걸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우리의 신앙 수준의 진보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하여 완성이 될 것이다.
그 진보란 어제와 나와 오늘의 나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이다. 그 싸움을 지속적으로 해 내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 이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가.
3.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행함과 하나님을 인식하며 행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나타날 수 있는가.
4. 내가 꼭 갖고 싶은 성품이 있는가. 왜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가.
5. 나에게 변화된 성품이 있는가. 혹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왜 변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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