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만일 필연이라면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것인가.
● 바울의 에베소 사역 이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서 6년 만에 마게도냐를 방문한다. 2차 전도여행 때에 세운 도시 교회들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실 이 여행은 바울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여행이었다.(고후7:5)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벌어진 파벌 싸움과 이교도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두 번째 방문한 바울을 거부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바울이 에베소에서 디도를 통해 고통과 눈물과 한숨을 담은 ‘눈물의 편지’를 고린도에 보냈다.(고후2:4. 이 편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음) 그리고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의 실체를 파악하라고 하였다.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그곳을 출발한 바울은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에서 디도를 만났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힌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광명의 천사같이 가장하여 바울이 떠난 후에 다른 예수를 전하고, 다른 영을 받게 했으며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선동했던 것이다.
디도가 전하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바울이 쓴 것이 ‘고린도후서’이다. 디도는 이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를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디도의 활약과 편지 덕분에 고린도 교회는 많이 안정이 되었다. 그 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 번째 방문했다.(고후13:1) 그래서 3개월을 머물며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서를 썼다.
바울은 고린도를 기점으로 다시 왔던 곳을 돌아서 육로로 예루살렘의 길에 오른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고린도에서 바로 배를 타면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데 왜 육로를 택했을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했기 때문이다.(3절)
이 때는 무교절 시즌이라 해외에 있는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인다. 그렇기에 만일 바울이 배를 타는 해로를 택하면 유대인들이 배에 함께 타서 바울을 바다에 수장을 시킬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이 해로가 아닌 육로를 택해서 가게 된 것이다.
육로로 가는 과정 속에서 흥미 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지난 빌립보 사역 이후에 헤어졌던(행16장) 누가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바울을, 이 때부터 누가가 사도행전 마지막 끝까지 동행한다. 이로 인해 사도행전이 기록될 수 있었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생을 어떻게 주님께 드렸는지, 복음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파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바울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의 공모 덕분이다. 그렇다면 이 유대인의 공모와 빌립보에서 누가를 다시 만난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필연일까.
결론을 아는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인도요, 계획이요,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몸 약한 바울이 먼 육로의 길을 택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일에 우연이란 없다. 모두 다 하나님의 계획이요, 인도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이것을 우연으로 믿는 사람은 평생 한번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섭리로 믿는 사람은 오늘이라도 또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는 자신의 인생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다.
● 유두고 사건
고린도를 떠나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 교인들을 대상으로 늦은 밤까지 강론을 한다. 그 때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바울이 안아서 살려 낸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있다.
1) 유두고가 정말 죽었는가.
누가는 이 유두고의 죽음을 평범한 죽었다는 뜻의 헬라어 ‘텔류타오’를 쓰지 않고, ‘네크로스’를 사용했다. 이 단어의 원형은 ‘네퀴스’로 ‘시체’라는 뜻이다. 의사인 누가가 유두고에게 사망선고를 한 것이다.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가는 정황이 있다. 그것은 바울이 그를 안고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고 한 것이다.
2) 생명이 그에게 있다는 뜻은?
성경적 사망은 호흡과 맥박이 없는 생물학적인 개념과 다르다. 기독교적 사망은 ‘분리’의 개념이다. 성경은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분리된 것이 사망이다. 그러니까 의사인 누가는 생물학적인 사망선고를 했다면, 바울은 성경적 관점으로 아직 생명(프쉬케, 영혼의 뜻)이 있다고 한 것이다.
3) 유두고 사건은 우연 혹은 필연
이 사건이 왜 드로아 교회에 일어났을까. 지금까지는 바울이 안식일을 지켰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이 드로아 교회 이후에 공식적으로 교회는 주일을 지킨다.(그 주간의 첫날. 7절) 안식일을 지킨다는 뜻은 ‘속죄’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반면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부활’을 기다림을 의미한다.
그런데, 속죄는 이미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남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이 부활을 기다리는 첫 날에 하나님께서는 드로아 교인들로 하여금 유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게 하셨다. 이를 통하여 부활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확인한 모든 교회는 이 날을 기점으로 주일을 지킨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필연인가. 이 사건은 바울이 해로가 아닌 육로를 택했기에 벌어진 일이요. 이 유두고 사건을 알게 된 것은, 빌립보에서 필연적으로 만난 누가가 바울과 조인해서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그 분의 뜻 안에서 계획인 일이었다.
이제 말씀을 근거 삼아 조금 더 담대하고, 안심하는 삶을 살자. 그리고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는 참된 신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가장 마음을 쏟았던 사람 혹은 대상으로부터 소외(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가. 나는 어떻게 처신했는가.
3. 내 삶 속에 있는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를 한 가지만 말해 보라
4. 가장 안 좋았던 사건이 돌아보니 내게 유익이었던 경험을 말해 보라
5. 나는 부활을 믿는가. 믿는 이유와 믿기지 않는 이유를 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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