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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2021. 사도행전 강해(46) 나 비록 연약하여도. 행19:21~32절

Updated: May 26, 2021

바울은 1차, 2차전도 여행 이후에 전략을 바꾸었다. 이전까지는 각 도시마다 잠깐씩 머물러서 교회를 세우고 떠났다. 하지만 고린도로 시작해서 3차 전도여행 때는 에베소에 3년을 머물면서 제자양육을 했다. 전략을 바꾼 이유는 바울이 교회를 떠난 후에는 영락없이 이단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쉽게 사람들이 이 이단의 사상에 금방 넘어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공적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에 다른 종교는 보상의 종교이다. 내가 신을 위하여 얼만큼 하느냐에 따라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 상식과 이성은 보상이 맞다. 그렇기에 쉽게 이단의 교리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가르쳐 제자들을 육성했다. 말씀을 알아야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정확히 이해하고 사역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영적으로 강한 무장을 하고 있었을 당시에 로마를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21절) 이를 위하여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선발대로 보내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로마로 보낸다.(롬16:3) 곧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라 여겼다. 그러나 로마의 비전을 선포했던 바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사도에게 보고한 후에 바로 로마로 가려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집단 반발을 하여 가이사랴로 옮겨져 바로 감옥으로 가서 2년을 보낸다. 물론, 나중에 로마에 가기는 한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자유인으로 가지 않고 죄수의 신분으로 압송되어 간다. 그것도 비전을 선포한지 3년 후다.

바울의 계획이 빗나간 것은 이번 뿐 만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에 로마를 지나 서바나(스페인)까지 갈 계획을 세웠다.(롬15:28) 그 때에는 스페인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당연히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가.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래서 그가 계획했던 스페인 방문은 무산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바울. 로마와 서바나 행은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확산이 목표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세운 계획은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바울의 계획은 인간적인 계획이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본래 21절에는 ‘바울이 작정했다’는 부분에 헬라어 ‘엔 토 프뉴마티’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in the spirit)'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로마를 가려는 계획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계획이라는 뜻이다. 본인은 몰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교훈을 주는 얘기이다.

바울은 로마에 자유인으로 가게 될 줄 알았지만,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되어 간다. 그러니까 그 방법적인 부분은 다를 지라도 로마로 가는 방향성은 하나님의 뜻이 맞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실제 바울은 비전 선포를 한 후에 성령을 통하여 본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란을 받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20:23, 2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바꾸지 않고 그 길을 간다. 왜냐하면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내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더라도 로마라는 방향성이 맞다면, 그 뜻을 이루시는 방법은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바울의 이 모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세 번의 전도 여행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이다.

● 이어지는 사역

바울이 에베소에서 끼친 영적 영향력은 컸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마술하는 사람들이 회심하여 그들의 책 은 오만 어치를 불태우는 일이 생겨났다. 이 일로 큰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바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더메드리오가 직공들과 조합 사람들을 부추 켜서 바울을 잡으려 했으나 못 잡았다. 대신 군중들이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서 연극장을 가득 매워 소동을 일으켰다. 이 때 로마의 최고 행정 관리였던 서기관이 송사할 일이 있으면 정식 재판하여 민회의 결정을 따르라며 그 모임을 해산 시켰다.

여기서 ‘민회’(39절)와 ‘모임’(41절)이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바로 ‘에클레시아’다. 이 단어는 ‘어딘가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한국말의 ‘교회’가 바로 그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따로 불러내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는 세 무리의 에클레시아가 존재한다. 그것은 민회, 모임 그리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이다. 믿는 자의 무리 즉, 교회이다. 이 세 그룹의 사람들은 외양적으로, 내적으로 차이가 없다. 외모는 디아스포라이기에 헬라인과 닮았고, 내면도 물질에 약하고, 시기, 질투하는 모습이 세 그룹 모두 같다.

그런데 딱 하나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교회를 말하느냐, 아니면 군중을 말하는가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 결정적인 차이, 우리 안에 예수가 계신다면 그 형편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보호, 인도, 간섭하심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제대로 된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맞다. 사실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교회가 없는 것은 지금만 그런 것 아니다. 교회가 막 세워진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한번도 교회가 완전한 적이 없었다. 늘 문제가 많고 탈 많은 곳. 그곳이 교회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만일 완벽한 교회가 존재했다면 예수님이 필요없다. 결코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예수님이 필요하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런 형편없는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이야기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있는 한 교회는 영원할 것이다. 핍박이 있더라도, 부서뜨리려 하는 그 악한 무리가 있더라도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믿고 오늘의 신앙을 힘써 키워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 나눔 질문

1. 진짜 같은 이단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2. 내 계획이 틀어졌을 때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3. 하나님의 뜻이 맞는데 고난을 동반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4. 지금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5. 교회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로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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