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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2022. 에베소서 강해(10) 바울의 간구. 엡3장 14~21절

본문 14절은 ‘이러므로’로 시작한다. 사실 이 말은 2장 22절에서 이어지는 구절이다. 바울은 2장에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갈라져 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막힌 담을 헐어서 하나로 묶었다. 이제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성전)가 되기 위하여 지어져 간다’라고 전했다. 이 14절은 그것과 연결된다. 1~13절은 이러한 내용을 두고 기도하는 바울 자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2장에서 다룬 내용을 위하여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이다. 그의 간구는 무엇인가.

1. 속사람의 강건 (16절)

성경 곳곳에서 ‘속사람’에 대한 말씀이 등장한다. 그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강한 정신이라면 내면의 힘을 키우는 정신 수양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성경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즉, 그 방법은 유일하게 ‘믿음’만으로 가능하다.(16절)

속사람의 강건이란, 내 삶이 곤고하고 어려울수록 더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다시 한번 상기하여 그 분을 묵상하는 가운데서 솟아나는 자유함을 말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경험하면 가능하다.(16절)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다. 그는 그 절대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하여 축복을 하며 떠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그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봤기 때문에 가능했다.(행7:55) 그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본 자는 현실의 고난과 아픔이 오히려 내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것이 속사람의 강건함이고 바울은 이를 위하여 기도했다.

2.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17절)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혼동되는 사건이 있다. 그것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두 분 모두 신자에게 내주(dwelling)하신다. 이 둘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성령의 내주는 외적인 증거가 있다. 방언, 예언, 환상 등을 통해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약속된 성령 침례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내주는 아주 조용하다. 어떤 폭발적인 강렬함이 없다. 우리가 성령의 내주하심은 많이 인지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는 성령의 내주는 연애로,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결혼 생활로 비유할 수 있다.

연애 때의 사랑과 결혼의 사랑은 다르다. 연애 때는 뜨겁게 타오르는 감정이 있다. 하지만 결혼의 사랑은 그런 감정과는 다르다. 책임을 동반한 꾸준한 지속력이 필요하다. 연애 때의 사랑은 불타는 사랑이라면, 부부의 사랑은 지속적인 온돌의 따뜻함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내주하심은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외적인 증거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오늘의 삶 속에 그와 함께 하는 꾸준함으로 신자의 삶에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비로운 현상이 없다. 삶 속에 드러나는 특별함이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이 삶 속에서 표현이 된다. 교회는 이를 통하여 성장하고,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그리스도의 터로 굳건히 서게 된다.(17절)

3. 하나님의 충만 (19절)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기를 간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의 충만이 그들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9절)

우리의 삶은 4차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이 다 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게 제한된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차원에 이르면 우리는 우리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비된 복들을 볼 수 있다. 그 복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이것을 현재 보지는 못할지라도, 결코 이해할 수는 없을 지라도 이러한 것이 있음을 확실하게 깨닫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바울이 그러했다. 바울은 삼층천을 경험한 사람이다.(고후12:1~10) 바울은 이 땅을 벗어나면 볼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했다. 그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글로 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 담아내면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사고의 제약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비밀을 알았고, 그렇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그 하나님의 풍성함을 깨닫기를 바라는 기도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기도이다. 바울의 기도는 철저하게 영적인 것을 구한다. 하나님께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채워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면, 그 순간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험악한 환경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넉넉함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한다. 그저 무언가 물리적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느라 애쓰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풍성함이 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충만함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게 되기를 구하자. 그 때에 우리는 진정한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 속사람은 어떠한가. 강건하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를 말해보라

3. 내가 본 최고의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서로의 경험을 말해 보라

4. 내가 생각하는 연애와 결혼생활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을 성령의 내주와 그리스도의 내주와 비교해서 설명해 보라.

5. 내 기도는 물리적인 것을 요구하는 기도가 많은가. 아니면 영적인 것이 많은가. 내가 생각하는 영적인 간구는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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