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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2021. 사도행전 강해(45) 예수의 능력과 권세. 행19:8~20절

에베소는 로마의 4대 도시 중 하나로써 로마에서 아시아로 가는 무역선들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무역이 활발했었고, 헬라의 가장 큰 건축물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에는 수천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낮에는 제사를 하고 밤에는 몸을 팔았던 창기였다.

특별히 신전 내부와 주변은 치외법권 지대였기에 이 지역은 각종 범죄자들로 넘쳐났다. 그 뿐 아니라 무당과 마법사들의 천국이기도 했던 에베소는 온갖 미신과 이상한 종교적 행위와 부적이 난무하는 아주 혼탁한 타락의 도시였다. 이곳에서 바울이 3년간 사역을 했다.

● 선교 전략의 변화

이전에는 바울이 한 도시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런데 1, 2차전도 여행을 하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운 뒤 본인이 떠난 후에는 기반이 많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에베소에 오래 머물게 된 이유도 복음을 대적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전16:8,9)

바울은 구원 받는 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리더를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그들과 같이 보내며 사역을 전수했다. 예수님이 12제자에게 집중했던 것처럼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같이 복음을 가르치고 사역을 나누고 친밀한 교제를 했다.

교회에서는 반드시 3가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1) 복음 교육 : 성경의 역사를 배우고 삶을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 안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해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구원자)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가르쳐야 한다.

2) 동역(사역의 나눔) : 성경공부 인도, 설교 심지어 침례까지도 모든 것을 목사와 나누어져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만인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도는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역의 부분에서는 목사의 사역과 평신도의 사역을 구분 지으려 한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영적 비겁함일 수 있다.

예수님도 침례를 직접 주지 않았고, 바울 역시 침례를 직접 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침례를 당연히 바울이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바울이 위임했듯이 교회 사역은 나누어져야한다. 그래야 책임감 있는 리더가 세워지고, 교회가 어려운 일이 생겨도 든든히 설 수 있게 된다.


3) 친밀한 교제 : 교회는 가르침을 받는 곳일 뿐 만 아니라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성도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만이 내 신앙이 자란다. 왜 교제가 필요한가. 내가 배우고 거한 진리가 사실인가를 확인하는 자리가 교제이다. 만일 이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복음의 진리가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성도의 교제는 가족보다 진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가운데 사랑으로 함께 하는 관계이다. 그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물론이요 갈라디아 교인들 역시 바울을 위하여 목숨과 눈도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랑으로 시작된 교제가 상처와 실망 그리고 분노로 이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러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성도의 교제를 피하여 스스로 고립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충분히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도의 교제를 두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하여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많은 유익을 누림과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은 예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을 배워야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코이노이아, 복된 교제로 승화된다.

● 바울의 독특한 사역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독특한 능력을 행하셨다. 그것은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다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축사(귀신 쫓는 일)는 내 능력, 내 영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축사는 믿는 자 모두에게 따르는 능력이라고 하셨다.(막16:17)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뜻밖의 사건을 만난다. 그것은 제사장 스와게의 일곱 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려 하다가 실패했다.(15절) 귀신이 나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우리 기독교의 축사는 예수의 이름을 주문이나 방법으로 행하지 않는다. ‘믿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것이 그의 손 아래 있다는 믿음이 축사(귀신 쫓는 일)의 핵심 키이다. 반면에 스와게의 일곱 아들은 예수의 이름을 주문처럼 여겼다.

그들은 믿는 자도 아니었다. 마술사(퇴마사 무당)였다. 믿음이 아닌 ‘시험삼아’ 행했으며, 본인의 믿음이 아닌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라고 해서 자신과 예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헬:파랑겔로)하는 것이 아닌 ‘탄원하고 간청’했다(헬:홀티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13절)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귀신을 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축사는 ‘믿음’만이 가능하다.

● 바울이 침례를 직접 주지 않은 이유

바울이 침례를 직접 주지 않았던 이유는 이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고전1:17) 바울이 침례를 주는 순간, 침례를 받은 자는 본인이 영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파를 만들고, 복음이 아닌 다른 요식 행위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요식 행위와 기적들도 그 자체가 결과요, 목표인 것은 없다. 그것을 넘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 은혜를 바라 볼 때에 기적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게 된다. 하지만, 침례,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는 그 요식 행위와 기적 자체가 목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한가, 아니면 바울의 손수건이 필요한가. 나의 인생의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라는 지원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오늘의 스게와의 일곱 아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 묵주, 심지어 성경책 마저도 그 자체를 영적인 부산물로 여기고 존중히 여긴다면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다른 영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만이 우리 신자의 능력이다. 그 이외의 다른 복음은 없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영적으로 지쳤을 때 회복하는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3.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4. 만일 내 앞에 귀신 들린자가 서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게되는가

5. 내게 예수 외에 다른 것이 우상된 것이 있는가.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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