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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2022. 에베소서 강해(9) 교회가 가진 비밀. 엡3장 1~13절

Updated: May 18, 2022

유대인들은 그들 만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시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줄기차게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창12:3,28:14)

이 에베소서는 그들이 갖고 있는 이 고정관념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책이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칭하며 이 비밀에 대하여 그의 서신에서 19번씩이나 강조하여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밀은 무엇인가.

●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그것은 구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런 상관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면 누구나 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비밀(mystery)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신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방인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바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리 유대인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과 노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

흔히 우리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은 ‘복이 있는 자(blessed)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시1:1,2)’고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이미 복을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요 현상이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행하는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율법을 외우고 충실히 지켰지만,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결국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었다.

이것은 기도도 동일하다. 우리는 간혹 ‘기도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상당히 종교적이고 신실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곧, 영적인 아버지와의 대화이다.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아버지를 사랑해서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대화에 문제가 있어 의지를 동원해야 하는 경우이다.

기도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목숨을 걸만큼 비장할 필요가 없다. 그저 시마다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이 기도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놓치면 기도가 단순 종교 행위가 되고, 이 행위가 자랑이 된다. 이는 오히려 기독교가 인과율에 의한 인본주의 혹은 미신적인 신앙이 될 확률이 농후하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십자가 복음’이다. 복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나에게 하나님이 조건 없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기도가 나의 행위와 노력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미한다. 그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거저 얻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내가 얻은 구원, 그 자유, 그 풍성함에 놀라며 진정한 복의 누림이 시작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 상식, 내 감정이 아닌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 상식, 감정이 아닌 말씀

바울은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 구원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계시로 가능하다고 한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당신의 뜻을 알려주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계시는 누구나 쉽게 받지 못한다. 그리고 받았어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으로부터 인지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전혀 헷갈리지 않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말씀이다.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하신 계시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계시를 바울이 말씀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3~5절) 그것은 오늘날의 성경이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을 때에 무언가 영감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으려고 하지 말라.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적인 것과 느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다. 흔히 기도 가운데 평강이 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혀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 형을 코 앞에 둔 전날 밤에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음’을 호소하였다.(마14:34) 평강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이랬던 그가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행동의 모든 기준은 말씀이었기 때문이다.(마21:4) 내 감정, 내 느낌, 내 상식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아야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하는 시간 이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고, 복을 받은 자가 걸어야 할 바른 방향과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다. 이는 복을 받기 위하여 가는 길이 아니다. 이미 내가 받은 복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알고 깨달은 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요 복음의 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을 깨달은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으신다. 우리를 계속해서 몰아가신다.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어떤 사명인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비밀을 전하게 하는 사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부터 감추어졌었던 비밀을 드러나게 하기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하시는가. 그것은 교회를 통해서이다.(10절)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을 전하는 통로로 교회를 택하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이요. 교회가 해야 할 큰 사명이다.

이제 교회는 그 사명을 받은 자답게 행해야 한다. 복음 전파는 나의 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단지 주께서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교회를 쓰시겠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명하셨으니 이루실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풍성한 자리에 서야한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행함은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이 땅에서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복을 받는 조건과 비결이 있는가. 그것이 성경에 비추었을 때에 옳은가.

3. 오래 알고 있었던 말씀 혹은 신앙생활이 알고 보니 성경과는 다른 적이 있었는가.

4. 나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5.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요소인 기도, 말씀, 찬양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왜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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