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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2021. 사도행전 강해(42) 아덴에서의 사역. 행17:13~25절

Updated: Apr 27, 2021

데살로니가에서의 핍박으로 인하여 베뢰아로 향했던 바울과 그의 일행(실라, 디모데)은 베뢰아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로부터 온 유대인의 핍박으로 인하여 바울을 배를 태워 아덴으로 피신시켰다.

● 아덴은 어떤 도시인가

지금의 그리스 수도 아테네이다. B.C 500년에 헬레니즘 문화가 집결된 곳이며 철학의 본산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큐로스 등)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또한 이 도시에는 파르테논 신전, 제우스 신전 등 크고 웅장한 신전이 많이 있었고, 1만 7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도 있었다. 한 마디로 문화의 절정을 이룬 곳이다.

이 도시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문화와 철학 즉, 이성적 사고가 충만한 곳인데 종교심이 많았다. 그 종교심의 끝은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을 경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성이란, 세상의 모든 근본 이치와 본질을 합리성을 갖고 이유를 밝힌다는 것이다. 반면에 종교는 영적이다. 결코 이성으로 답할 수 없다. 논리와 이성으로 증명해 낼 수 없는 분야가 바로 종교다.

그러니까 이성을 추구하고 그것에서 삶의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다른 도시 보다도 훨씬 더 극단적으로 종교의 창궐함이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이성은 결국에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사고는, 가장 단순한 질문인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가’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것조차도 답이 없다. 결국에는 자기 인식의 한계에 다다른다. 그렇게 되면 겸손해 질 수 밖에 없고, 결국에는 신이라는 존재를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덴의 사람들은 철학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답을 종교에서 찾았다. 하지만 상당한 지식과 이성을 가진 그들이 ‘알 수 없는 신’을 섬긴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만족시키려 했다. 그것이 결국에는 엄청나게 큰 신전을 지어 신들로 하여금 만족하게 하려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이성과 종교심에 바울이 폭탄을 던진다.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전에는 결코 신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땅의 주재, 주인은 손으로 만든 곳에 있지 않은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그 하나님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사랑의 신이라고 전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25절)라는 바울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줄 때에 그것을 조건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요. 자녀이기 때문에 친히 생명과 호흡을 거저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그들이 믿는 신과 우리의 하나님과의 큰 차이이다.

이러한 이유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헌신과 헌금을 드릴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해야 나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신다’고 생각해서 복에 대한 조건을 붙인다면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쓰기도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조건적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과 헌금은 복의 조건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좋아서 그분께 감사로 드리는 것이다. 마치 자녀가 부모님께 최대한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고, 내가 갖고 있는 물질과 시간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표현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십일조를 하면 복을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말3:10) 우리는 이 부분을 십일조를 하면 내가 드린 것 보다 몇 배의 물질을 내게 쏟아 부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결코 그런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하면 돈을 채워 주겠다고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약속은 ‘재물’이 아니다. ‘복’이다. 우리가 복을 재물로 생각하니까 그 ‘복’을 재물로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베라카)은 물질을 넘어선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하면 내 인생의 행복이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내 인생을 끌고 가고 주관하시는 그 복을 체험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는 궁극적인 복이요. 성경의 약속이다.

● 목회자 바울

우리는 바울을 생각할 때에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 목표 지향적 기질, 정에 끌리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베뢰아에서 큰 봉변을 당해서 아덴으로 갈 때에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 두고 혼자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4절)


왜 그렇게 했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베뢰아 교회를 위해서이다. 아직 베뢰아 교회가 단단히 서지 않았기에 복음을 더 듣게 하기 위해서이다.

베뢰아와 아덴은 배로 약 4일 거리이다. 그렇기에 다시 이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약 8일 이상 지난 후일 것이다.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복음을 들려주기 위한 바울의 배려이다.


아덴에서 바울과 조인한 실라와 디모데는 그와 오래 거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들을 바로 마게도냐(데살로니가 포함)로 떠나보내 앞서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게 했다.(살전3:2, 행18:5)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끊임없이 교회 걱정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과 안위 보다 항상 함께 한 믿음의 가족들에 대한 걱정을 했다. 본인은 망가지고, 부서지고, 매 맞고, 잠 못 자도 그는 한 순간도 교회에 대한 생각을 놓은 적이 없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의 모습이었고, 자기의 천성적인 기질로 인하여 가려진 목회자 바울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일로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신자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돕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제 일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복음전파’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세운 교회 공동체인 믿음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마28:19,20)

사실 ‘복음전파’는 나를 위함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기준과 목표가 하나님이 될 때만이 만족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인생의 목표요, 방향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있는가. 내가 내린 인생의 결론과 답은 무엇인가.

3.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나 혹은 철학적 명언이 있는가. 왜 그것을 좋아하는가.

4. 내가 생각하는 십일조 혹은 헌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5. 우리 교회 안에 존경 받을 만한 믿음의 평신도 모델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에피소드를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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