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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2021. 사도행전 강해(41) 데살로니가의 사역. 행17:1~10절

데살로니가 사역은 바울,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팀이 되어 전도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곳으로 마케도냐의 행정 수도이며 당시에 인구가 이미 20만 명이었다. 정치적, 문화적, 행정적으로 발전된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3주를 연속으로 안식일에 강론을 했다.

1. 회당이 타겟인 이유

바울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강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일단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구원자)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개념이며, 있더라도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다른 종교는 절대적인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사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반해, 유대교의 메시야는 이상적인 왕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 왕이 이스라엘의 국난을 타개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을 하나님이 보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의 ‘구원자’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바울이 회당에서 한 일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 성경의 내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풀어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바로 이 예수다’라는 것을 전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헬라인이다. 그렇기에 메시야를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번역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고 선언했다.(3절)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 짓는 가장 핵심적인 차이다. 다른 종교는 선행으로 구원 얻는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결론적으로는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를 수 있으나,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외에는 구원으로 가는 길은 없다”고 말한다. 오직 그분 만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파생된 종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혈통적인 조상으로 섬긴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이것을 결정짓는 기준이 ‘예수’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예수가 경배의 대상이고, 찬양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기독교의 중심 내용이다.

만일 개신교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 중에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은 지극히 강조가 되어 있지만 예수에 대한 얘기가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다. 누군가 열심히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를 잘 모른다면, 그분에 대한 인지가 없다면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다. 거기에 무서움이 있다.

바울이 바로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당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한다. 그러나 예수가 없다. 그것을 바울이 못 참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기에 그를 경배하고, 그 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 밖에 없다. 이 인식이 있고, 그것을 믿는 자가 기독교인이다.

2. 야손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에 약 3주를 머물렀다. 짧은 기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상당히 영향력 있고, 은혜로운 교회로 성장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 전역, 즉 아가야와 마게도냐 전역에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이 소문은 곳곳에 퍼졌다.(살전1:7,8절) 이러한 교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야손’이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개척멤버이다.

바울과 실라가 전한 복음을 듣고 큰 무리의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서 찾아간 곳이 ‘야손의 집’이다. 이는 곧 야손의 집에서 바울과 정기적인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 집에 바울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바울 대신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을 읍장에게 끌고 갔다. 그리고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다’며 읍장들에게 고했다.(7절) 이를 보면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가 중심이었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야손이 중심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야손은 바울에게 친척이라고 불리며 끝까지 동역을 했다.(롬16:21) 그렇다. 교회는 이런 헌신된 사람을 통하여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어간다.

루디아와 야손은 복음을 배우고 접한 것은 불과 몇 주에서 몇 개월이다. 사실 내 안의 복음이 능력을 발하는 것은 이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더 배우고, 더 알아야 일 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 반하는 얘기다. 많은 경우에 영적인 성장은 많은 배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가 지나면 자라지 않는다. 그 후는 영적인 성장이 아니다.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다.

신자의 영적 성숙은 현장(field)에서 무르익는다. 내가 갖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다른 이에게 쏟아내고, 내가 복음의 통로로 삶을 살 때에 성장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끊임없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분을 깊이 만나는 훈련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긴 시간이 지나도 유아기 수준에 머물게 된다.

잡혀있던 야손은 유대인과 읍장들에게 ‘보석금’을 주고 풀려났다.(9절) 그런데 여기서 보석금으로 번역된 헬라어 ‘히카노스’는 꼭 금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요구에 만족을 주는 행위를 했다는 뜻이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처형했을 때의 ‘만족’과 똑같은 단어이다(막15장)

그러니까 야손은 읍장들에게 바울에게 더 이상 협조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서약을 한 야손은 풀려나자마자 바로 바울을 만난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밤 중에 베뢰아로 보낸다. 그 뒤로 바울은 더 이상 데살로니가로 오지 못했다.(살전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영적으로 잘 성장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복음의 핵심인 “예수가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했고, 그 복음에 걸맞는 신앙의 행동이 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이 질문을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부디 베드로 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올려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 나눔 질문

1. 내가 가장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2.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루디아 혹은 야손 같은 인물이 있는가. 언제 만났고,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3. 내가 지금 당장 사역을 하기에 주저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정말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4. 바울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왔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5. 예수 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가. 믿으면 쎌원들 앞에서 입으로 고백을 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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