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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2022. 아브라함의 이야기(14) 복이 되는 인생. 창23:1~6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로 죽음을 맞았다. 그녀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사라의 임종 당시 이삭의 나이는 37세였다. 그런데 이삭은 40세에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사라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충분히 하나님을 원망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한 행동을 한다. 그것은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간 것’이다.(3절) 이 문장을 히브리어의 원어의 다른 해석을 적용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사라의 얼굴 위에서 일어났다’라는 번역을 가능하다. 아니, 사실 당시 풍습을 미루어 짐작하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동했을 확률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은 히브리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나온다. 대표적으로는 엘리사가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릴 때에 나온다. 엘리사가 죽은 아들에게 가서 그 시신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포개두자 아들이 살아났다(왕하4:345) 사도바울의 사례도 있다. 바울이 유두고라는 청년이 설교를 듣다가 위층에서 떨어져 죽은 일이 있었다. 그 때도 바울은 죽은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려서 서로의 몸을 포개어 죽은 청년을 살려낸다.(행20:10)

죽은 자 위에 산 자가 포개어지고, 그 후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 즉, 부활하게 될 것을 상징한다. 즉,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한 행동은 주 안에서 죽은 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히브리가 저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단에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이삭을 죽일 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에 그 일이 가능했다고 얘기한다(히11:19)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내 삶 속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로 인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는 것이다.(히11:13) 아브라함은 이제 믿음으로 멀리 보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 나그네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온지 벌써 62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본인의 정체성을 ‘나그네’라고 얘기한다. 실제적으로 그는 그 동안 자기 명의로 된 땅 한 평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나그네 인생을 사는 자들은 죽은 후에 가족들이 그를 고향에 이고 가서 매장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헷 족속 사람에게 땅을 사서 그곳에 사라를 매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하나님을 믿은 이후에는 자신의 고향이 물리적으로 태어난 곳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본향이라고 믿고 살았음을 의미한다.(히11:15,16) 그렇기에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은 장소에 상관없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우리는 그 후에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천국과 지옥은 존재한다. 그 천국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임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 그 믿음이 있는 자만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 신자의 삶의 자세

아브라함은 헷 족속 ‘에브론’이라는 사람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구입한다. 그런데 이 에브론이라는 자가 참 황당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 땅 값을 은근히 말하는데 ‘은 4백 세겔’이라고 말한다.


왜 이것이 황당한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금액은 당시의 시세에 비해서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년 연봉은 은 10세겔이었다. 그런데 고작 사라를 매장할 장지의 가격이 4백 세겔은 말이 안 되는 가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1전 하나도 깎지 않고 전액 다 지불하여 매입을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활을 믿고, 하늘에 본향이 있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장성한 후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이웃인 헷 족속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평가를 하고 있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고 얘기한다.(6절) 이 말을 조금 의역하면 ‘당신은 우리 중에서 유독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헷 족속 사람들이 보기에도 자기들 무리 가운데 아브라함만 유독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음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받은 복을 나 혼자 누리고, 나만 즐기고, 나만 만족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결코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없다. 나와 함께 사는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나누고 사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헷 족속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덕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서삼경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모두가 이 5가지 복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은 많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에게 이 복을 받기 위해서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 ‘네가 복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복을 좇아 살고자 할 때에는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살았더니, 그의 말년은 그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었다. 내 스스로가 복이 되려면 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복의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창12:1,2) 그가 가장 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행했고, 결국에는 그의 말년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복의 사람’이 되었다.

불신자들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는다. 신자의 삶이라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한다. 신자 각자의 삶이 곧 지금 현재도 쓰이고 있는 그들이 보는 성경이다. 그것은 내가 아닌 남을 세우는 삶이고, 돕는 삶이고, 덕이 되는 삶이다.


남을 살리는 삶의 시작은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 축복의 언어, 따뜻한 위로의 말로도 충분하다. 주변에 복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가자. 왜냐하면 내가 곧 복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에게 복이 된 사람이 있는가. 왜 그 사람이 내게 복이라 생각하는가.

3. 내가 그에게 복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왜 그 사람에게 복이 되고 싶은가.

4.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복은 무엇인가. 교과서 적인 답이 아닌 솔직한 나의 마음의 생각을 나누어보라

5. 불신자가 나의 삶을 성경으로 보고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평가할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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