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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2023. 호세아서 강해(7): 하나님의 시선. 호8:1~14절

Updated: Jan 26, 2023

호세아가 처음 활동하던 여로보암 왕 시기는 국력이 강대했다. 하지만 7장, 8장의 때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 때의 정치적 상황은 바로 혼란 그 자체였다. 정치적 혼란이 있었던 이유는 앗수르 제국이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앗수르를 대적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아람과 손을 잡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이어서 왕이 된 호세아는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다가 결국 앗수르에게 침공을 당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을 한다.(BC700년) 이런 혼란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시는가.

1. 뒤집지 않은 전병(Unflipped Pancakes)

전병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뜨거운 돌 위에 구운 빵이다. 그런데 뒤집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한쪽은 타고, 한쪽은 안 익는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위기 때에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에 신경을 쓰고 있느라 한쪽이 완전히 타고 있는데 전혀 모르고 있는 영적 무감각 상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압박을 받자 하나님께로 가지 않고 자기의 머리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주변 강대국에 조공을 하고 연맹을 맺는 방법을 사용하며 이것을 지혜로 여겼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이 일을 행하며 자신은 하나님을 잘 알기에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으로 여겼다.(8:2)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너희가 택한 그 방법은 내가 바라던 바도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요구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8:4) 이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거시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평화, 안정 그리고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에 자신의 만사형통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은 우상 숭배자들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를 왜 믿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내 삶의 안정과 행복을 보장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큰 차이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인도하고, 설득하고 그리고 이를 위하여 담금질도 하신다.

다른 종교의 신은 단순하다. 네가 나에게 잘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준다는 것이다. 그 잘하는 수준에 따라서 소원성취 여부가 결정된다. 하지만 그 신은 자신의 따르는 자를 위한 계획도, 의지도, 간섭도, 책임도 없다. 반면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사랑을 요구한다. 이 말은 곧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뜻을 나누는 수준의 관계로 우리를 대우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가능하게 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의 수준과 그릇이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행복은 돈, 명예, 권력을 통하여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존재 자체가 이러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수준의 사람이 되야 한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만족과 평안을 누리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목적이요. 계획이다.

겸손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보 같은 수 많은 실수 끝에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순간부터 겸손해진다. 하나님은 그렇게 시간이라는 세월 속에서 우리르 무르익게 하신다. 그렇게 빚어가고 그렇게 완성이 되는 것이다. 성품과 수준의 변화는 반드시 내가 경험하여 내 뼛속 깊숙이 박혀야 변화가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때로는 그것을 이용하신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해야지 만이 수준이 있는 자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편의적 종교인(A Convenient Religious Person)

이스라엘이 통일왕국이었을 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은 예루살렘 한 곳이었다. 이스라엘 전 백성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했다. 그러나 남북이 갈라진 후에는 문제가 생겼다. 예루살렘이 남유다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절기 때에 하나님께 제사하려면 북왕국 사람들이 남왕국 예루살렘을 가야했다.

이것이 못 마땅했던 북왕국 여로보암 왕은 북 이스라엘 땅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북왕국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도록 만들었다. 멀리 예루살렘으로 갈 필요 없도록 그들의 편의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진노했다.(8:5)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었기 때문이다.(출20:4) 아무리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자신의 편의성을 바꿔 버렸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시대상과 요즘의 모습은 상당히 비슷하다. 온라인 예배라는 편의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예배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하지만, 내가 대면으로 드리는 예배와 비교했을 때에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성심이 부족해진다면 반드시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진 예배의 편의성으로 인하여 단순한 종교인이 되지, 신앙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경고를 귀담아야 한다.

3. 믿음의 본질을 모르는 자(One Who Does Not Know the Essence Of Faith)

믿음은 내게서 시작된 싸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작한 싸움이며 하나님께서 결론지으실 그 분의 책임이다. 성경의 어떤 인물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마태도, 베드로도 그리고 바울 역시 모두 다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들의 그 어떤 실수에도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완성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이방신은 우리에게 자신을 향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아들을 죽여서 바치는 것으로 사랑을 증명하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믿음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셨다. 어떤 방법으로 하셨는가. 자신의 아들을 제물 삼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 그게 바로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가 그 믿음의 대상인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사건이다.(롬5:8)

이 사실을 믿는 자는 현재의 고통과 아픔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은 기다림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오늘 부서지고, 찢어져도 참아내고 버틸 수 있다. 매일 살아야 하는 죽을 것 같은 숨찬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월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무르익어가고, 커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삶이요. 원망과 탄식 속에 찬양을 섞어 가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대하는 건강한 신앙생활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영적인 감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10년 전의 나와 비교했을 때에 나에게 일어난 성품의 변화는 무엇인가

4. 온라인 예배를 통하여 신앙의 성장을 이룬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5.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위하여 일하신는 것을 나는 어떤 방법으로 확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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