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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o Yong Lee

팔복 Ⅷ: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마5:9절. 12.15.2019

팔복의 ‘화평케 한다’는 말의 의미와 ‘화평케 하는 자’란 무엇인가?

1. 화평케 함의 의미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화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내 노력과 힘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화평’이란 ‘하나님이 없는 자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싸움이나 대립에 대한 현상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오늘 팔복의 ‘화평케 한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레노 포이오스’라는 단어인데 성경에 딱 두 번 나온다. 하나는 형용사, 다른 하나는 동사로 쓰여졌는데 그 똑같은 단어가 골로새서에 나온다.

그것은 ‘화평을 이루사(골1:20)’라는 단어인데 여기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이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헬라어의 ‘화목’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eg:아포카탈랏소). 그러나 그는 굳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이레노 포이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2. 화평의 대상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에 그곳에 앉아 있던 제자들은 분명히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의 의미로 해석을 했을 것이다. 즉,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에 놓여있는 국가적 혼돈을 해결해 줄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게 벌어지는 물리적인 것, 상황적인 것이 해결이 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으로 선포되어지는 모든 평화는 다 피상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렘6:14). 겉으로는 평화를 주는 듯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현재 내게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상관없는 본질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평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며, 그 근본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 평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분이 ‘평강의 왕’이라고 말한다(사9:6). 그 말의 의미는 그 분 자체가 평강이고, 평강을 주관하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더 재밌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평강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실 것인데 우리의 노력과 수고와 공로가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룰 것이라고 한다(사9:7).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평화가 실현된 장소가 어디인가? 그것이 ‘십자가’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그 죄가 깨끗해짐으로써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시작된 평화가 우리에게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현실의 나와 어떻게 상관이 되는가?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자가 되어 이전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 상징이 바로 ‘침례’이고, 성경은 침례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얘기하고 있다(롬6:3,4). 즉, 내가 예수를 믿는 신앙의 고백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가 죽은 것처럼 우리도 죽게 되지만, 그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갈2:20).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었다’는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평화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죄 씻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본질적인 평화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팔복을 통해서 하신 약속의 실현이다.

3. 화평을 전하는자(화평케 하는자)

팔복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기에 복을 받은 자들에게 전하는 복의 선언이요. 감탄의 선포이다. 그래서 이 말을 직역하면 “복되도다. 화평케(!) 하는 자여.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이다. 그러니까, 일방적인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신자들은, 불신자들을 ‘화평케 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화평케 된 이들은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고후5: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망설인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결신의 부담’이다. 복음을 전하며 그 대상을 결신을 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또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본인은 은사가 없다고 생각해서 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강조해서 말하기를 불신자를 믿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를 이루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평화의 소식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두 번째로는 ‘내가 사랑을 받는다는 확신의 부족’이다. 하나님이 전능자임도 믿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믿지만,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 곧, ‘내 아버지’라는 확신이 없다. 예수가 인류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은 믿는데 ‘나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에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전하지를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의 행위와 공로와 내가 가진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하나님은, 단지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얘기한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차이이다. 신이 우리를 자녀로 대한다는 것은 그 어떤 다른 종교에도 없는 개념이다. 스스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복 되도다. 화평케 하는 자여. 너희가 내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기에 우리가 이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딸이다’라는 인식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가난한 신앙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복을 얻은 자이며, 앞으로 준비된 복들이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팔복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핵심 선포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 찔렸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가진 평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가? 이것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내가 가진 평화를 깨는 물리적, 환경적인 요인이 제거 되었을 때에 누리는 평화의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

4.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이 진심으로 내게 믿어지게 된 계기와 이유는 무엇이었나?

5. 전도한 경험이 있는가? 그 때의 경험을 나누어 보고,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전도 방법을 나누어 보라.

6. 내가 전도를 잘 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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