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가슴을 치는 아픔으로 인해 쉼을 누리지 못하는 애통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 아픔과 고통이 신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애통하는 자의 복’은 무엇인가?
1. 성경에서 말하는 애통의 의미 : 절대 슬픔
본문에 사용된 애통의 원어인 헬라어는 ‘펜떼오’(πενθεω)’이다. 이 말의 의미는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에 터져 나오는 슬픔’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약 9가지 정도의 눈물 혹은 슬픔을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그 중에 ‘펜떼오’가 가장 강력한 말이다. 마치 심장을 꿰뚫는 듯, 뼈를 깍는 듯,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다.
세상의 원리는 ‘소문만복래(웃으면 복이온다)’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을 겪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가? 왜냐하면,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 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을 대강 대강, 역경도 없이 지낸 사람은 하나님도 대강 대강 만난다. 하지만, 인생의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가운데에서 나의 한계를 절감한 사람은 시선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그 때에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안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신자의 복이다.
다윗의 예를 살펴 보자. 다윗은 1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했는냐고 물으면 그것은 압살롬이다. 다윗의 압살롬의 사랑은 극진했다. 그런데,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여 반역을 했다. 그는 울면서 맨발로 예루살렘을 떠나고 말할 수 없는 충격과 모욕을 당한다.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당하는 배역으로 인하여 갈갈이 찢어지는 마음이 된다. 이것이 애통이다.
그 아픔으로 인해 다윗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가?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시40:12)’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한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머물면 안된다. 그 애통이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의 인생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벌어진 일로 인하여 과거에 묶여 있으면 안 된다. 그곳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그 길을 통해서 우리는 팔복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2. 애통하는 자의 의미 : 자신의 죄를 직시하는 자를 의미
사람들 보기에도 완벽하고, 하나님 보기에도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칭함 받던 인물은 다윗이다. 그러나, 그가 일생일대 그의 자아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것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통 한 죄이다.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남편 우리야도 죽이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런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죄책감 없이 살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그의 죄를 폭로한다. 그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처절하게 무너진 자아를 그린 시가 있는데 그 시가 시편 51편이다. 그는 이 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을 원하는 것을 알게 된다(17절).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본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통감하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고백을 한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 생활을 통해서 내가 노력해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귀하긴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내가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언제고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죄악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가 나를 붙잡아 주지 않으면 이 타락의 구덩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자꾸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보이는 것이다. 나는 괜찮은 것 같으니 남의 잘못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덧 신앙생활이란 누가 더 선한 가를 증명하는 일로 대변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내가 남에게 손가락질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는가? 이 ‘펜떼오(애통)’의 어원은 히브리어 ‘페사흐’에서 파생되었다. ‘페사흐’ 단어의 뜻은 ‘애통하다’라는 것과 동시에 passover(유월절)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애통은 유월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장자가 죽지 않게 되었던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즉, 양의 피로 상징되는 ‘예수의 피’, 그 보혈 만이 우리를 죄로 인한 죽음에서 면하게 됨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애통(펜떼오)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passover된 구원으로 인도 받는다. 그것이 애통하는 자가 갖게 되는 구원의 길이다.
3. 애통하는 자의 구체적인 복 :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
힘든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공감’이다. 같은 아픔을 가진 자의 위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신 중에 예수님 만이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직접 다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기 위하여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 무서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가? 예수님의 실제 위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이 하는 위로는 책에 써 있는 내용이나, 들은 내용이 아니다. 본인이 제자들의 배신과 조롱과 극한 십자가를 겪은 후에 하신 ‘공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일을 감당하신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하신다.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여, 복되도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 있는자여, 복되도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는 자여...” 그렇다.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꽉 붙잡힌 인생이다. 그것을 좀 더 느끼고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애통의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다. 때로는 우리에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 있을 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그 아픔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 인생에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 있었는가? 그 때의 상황과 그것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3.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가? 그 때 얻은 교훈이 있다면 무엇인가?
4.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는가? 그것과 예수와 연관을 지어서 생각하고 있는가?
5. 내가 남의 흉을 볼 때에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내가 3자의 입장에서 나를 본다면 내가 어떨 것 같은가?
6. 나는 공감 능력이 많은 편인가? 아니면 부족한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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