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은 흔히 ‘누가복음의 심장’이라고 할 만큼 핵심 장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아마도 예수님이 하신 전 비유 중 가장 유명한 비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비유 속에는 3명의 인물(두 아들, 아버지)이 등장한다.
이 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본 비유를 살펴본다.
먼저 둘째 아들이다. 이 둘째 아들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탕자’다. 아버지의 품이 싫다고 떠난 아들이고,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한 패륜아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르면 아버지의 살아생전 에 분깃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것을 둘째 아들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당시 유대 사회는 철저하게 가부장적이고 장남 중심의 사회였다. 장남은 아버지의 많은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장남’이라는 말 자체는 축복과 명예의 상징이다.
이것은 둘째 아들의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고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율법으로까지 못을 박아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삶의 운명이다.
둘째 아들은 이런 율법이 싫었다. 그렇기에 이 부조리한 율법에 매여 있는 사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아주 먼 나라로 떠났다.
그런데 여기서 이 아들에 대해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다. 그 율법이 싫어서 떠난 것이다.
그는 단지, 숨 막히고 목을 조이는 것 같은 그 율법이 없는 사회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중에 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엄청난 고생을 한다. 그때 그는 누구를 떠올리는가. 아버지다. 이 말은 곧, 아버지는 내가 아무리 극한 죄를 범해도 사랑으로 나를 받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둘째 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지금 현재 있는 이곳이 내게 가장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기 뜻, 자기 생각대로 하면 훨씬 더 잘 살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그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아버지가 아들이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아니다. 결코 몰랐을 리가 없다. 당시 아들의 나이가 10대였을 터인데 이 나이의 아들이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나가서 잘 될 것으로 생각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재산을 주었을까.
그것은 아들이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를 떠난 삶이 피폐하고, 멸시와 굴욕이라는 것을 스스로 경험해 봐야, 아버지의 말이 참인 줄 안다. 그때 비로소 참 아들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일지라도 때로는 방임하신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님의 품이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래서 그것이 그의 인생에 해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그 망가진 시간을 통해 아버지의 중요성과 큰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보낸 그 엄청난 아픈 시간이 그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요, 가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고민하고 절망하는가. 그때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이다.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참 자유를 느끼며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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