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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 Ⅸ: 사사 삼손. 삿13:1~7절(05.10.2020)

삼손과 삼손 시대에는 다른 사사 시대와는 다른 몇 가지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 중 3가지를 살펴본다

1. 사사 삼손의 등장

사시 시대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사사가 등장을 할 때에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국가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킨다.


그런데 삼손이 등장할 때는 조금 다르다. 블레셋에 40년 동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이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거나 매달리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나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부르짖음, 회개라는 행위를 근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마땅한 반응이다. 본인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데 스스로 죄인이라는 자각도 없고, 회개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억지로 회개기도를 한다고 구원 받은 자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명하신다. 그 이유를 그들이 부르짖었기 때문이다(출3:9)라고 얘기한다. 이 얘기만 보면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근거로 구원하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에 앞서 2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즉, 그들의 부르짖음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들의 조상에게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이제 이행하시는 것이다.

사사기의 저자가 삼손 시대에 그들이 부르짖었다는 이야기를 뺀 것은 그들이 실제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국한할까봐 일부로 삭제한 것이다. 이것이 삼손의 이야기에 가장 처음 나오는 특징이다.

2. 나실인

삼손은 다른 사사와는 많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 다른가. 가장 큰 특징은 삼손은 군사 지도자가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적이 없다. 심지어 본인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생각도, 지도자로써 사명을 받았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생긴 대로 살았다.

그의 최고의 관심은 그저 여자였다. 수천의 블레셋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은 애국심 때문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질투심, 자존심과 복수심 때문이었다. 삼손이 그의 평생에 하나님을 찾은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번은 레히라는 지역에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을 죽인 후 목이 말라서였고,(15:18) 다른 한번은 후에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서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수모를 당할 때였다.(16:28) 이 때의 기도의 내용도 이스라엘의 구원이나, 회개가 아니다. 그저 ‘나’, 자기의 ‘복수’뿐이다. 그 생각만 하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는 ‘나실인’이다. 나실인은 ‘하나님 앞에 분별하여 드려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실인은 크게 3가지를 못한다. 부정한 것을 먹는 것,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 시체를 가까이 하는 일을 못한다. 그런데 삼손의 이 3가지를 완벽하게 다 어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개념도 없고, 생각도 없다. 그저 자기 위주로 살았다.

그런데 그는 들릴라에게 까무라칠만한 고백을 한다. 자기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이유가 본인은 나실인이기 때문에 안 잘랐다고 얘기 한다. 그가 스스로가 나실인이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머리카락을 안 잘랐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어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는데 머리카락을 안 잘랐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본인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 역시 이런 우를 범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던지 혹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유로 인해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나온 모든 말씀을 다 지켜도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기준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주님으로 믿느냐 그렇지 않은가로 구분한다. 그것 외에 다른 기준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이유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가능하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나의 종교심을 믿는가. 심각하게 나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3. 반복되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

삼손 이야기의 특색 중의 하나는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일은 다른 사사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러나 삼손의 경우는 다르다. 삼손은 다른 사사와는 달리 여호와의 영이 네 번이나 임했다.


1) 소년 시절(13:25),

2) 사자를 찢어 죽일 때(14:6),

3) 아스글론에서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일 때(15:14),

4) 레히에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일 때(15:4)이다.


이 일이 왜 중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삼손의 힘의 근원이 그의 머리카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삼손이 머리카락이 잘려서 힘을 잃었으니 나도 무언가 하나를 잃지 않고 지켜 나가면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런 공식으로 하나님을 인지하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도, 말씀 묵상, 절제된 종교생활 등의 이유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에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우선될 때에 나머지 신앙의 지침과 생활은 따라 오는 것이다.

삼손의 힘 역시 그의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다. 그 증거가 그가 힘을 크게 쓸 때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먼저 임했다. 그것이 그의 힘의 비밀이고 근원이다.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성경은 그가 머리카락이 잘린 후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고 얘기한다.(16:22) 그러나, 그는 그의 머리카락이 자라난 것으로 인하여 다시 힘이 세지지 않았다.

언제 그가 강력한 힘을 다시 찾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기도할 때였다.(16:28)

그가 힘을 다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을 때에 그는 블레셋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그의 힘의 근원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하나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의 의와 명예를 위해서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편없는 그의 인생 속에서도 그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빚어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이다. 그 사랑을 깨달은 자는 우리의 인생을 대할 때에 당당한 배짱을 갖고 걸어가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내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처음 깨달은 적은 언제인가? 그 때 나의 반응은?

2. 삼손의 이야기 속에 투영되어 보이는 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3. 내가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경험한 적은 언제인가? 분명히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일은?

4. 내가 생각하는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5. 내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주요 수단은 무엇인가? 그것이 잘 될 때와 안 될 때는 어떤 이유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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